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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歌辭)문학과 담양(潭陽)

하늘벗삼아 2012. 8. 16. 14:55

 

가사(歌辭)문학과 담양(潭陽)

 

담양(潭陽) 우리나라 가사문학(歌辭文學) 중심지다. (라고 들 한다)

 

담양 사람들이 가사에 대한 애착심과 자부심도 대단하여

가사문학관 까지 지어 놓았다.

 

 

사진 : 가사문학관. 광주 호반 식영정 옆에 있다.

 

가사(歌辭)는 영남(嶺南)에서도 지었다.

사랑(舍廊)으로 남자들은 한시(漢詩)를 지었겠지만

안으로 여자들 교육은 가사(歌辭)를 베껴 쓰는 것이었다.

베끼다가 능숙하게 되면 운을 읊어 애경사 때 글 한편 턱 짓거나,

사돈지(사돈에게 보내는 편지. 집안 위신이 달려 있어 아무나 못 쓴다)

라도 쓸 때면 마을 대표선수로 나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 지역-담양이 유독 가사(歌辭)의 중심지가 되었을까?

 

영남은 땅이 메말라 배가 고프니 ‘공부나’  열심히 했고

호남은 기름진 곳이라 살기에 풍족하여 즐기면서 놀기를 좋아하여

이쪽 담양에서 가사가 성행했다는 설명이 있다.

 

이런 식의 영호남 비교론-영남 척박, 호남 비옥에 따른 기질 비교는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도 여러 차례 비슷하게 나온다.

그러니 영호남 차이에 대한 이런 설명은 꽤 오랜 전에 널리 퍼진 것 같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오래 전부터 그리 알고 있다고 해서 꼭 사실인 것은 아니다.

 

설혹 호남이 땅이 기름진 덕에 마시고 놀기를 좋아했다는 것이 맞더라도

왜 유독 담양(潭陽)이 가사의 중심지가 되었는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담양(潭陽)이 호남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다른 설명이 더 있어야 할 것 같고, 나는 좀 달리 생각 하지만,

그것 따지러 이 글을 시작한 것이 아니니

더 이상은 그쪽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한다.

 

경위야 어쨌든 조선조 시대 가사 중 걸작(傑作)은 대부분 담양에서 나왔다.

면앙정가,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백발가, 민농가 등이

모두 담양에서 지어졌다.

 

역사 연구에서 어떤 문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전파되었는가를

따질 때 다음과 같은 요령이 있다.

 

시간적으로 오래 된 요소일수록 더욱 널리 분포되어 있고,

문화의 기원지점은 특질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특질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 문화의 기원지점’

이라는 것은 백지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릴 때

어디에 떨어뜨리는 지 미처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욱이 가장 두텁게 번져 있는 곳이 처음 떨어진 곳임을

알아보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것과 같은 원리다.

 

가사(歌辭)의 걸작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곳이 담양이니

그 곳이 바로 가사문학이 시작된 중심지임에는 의심이 없다 하겠다.

 

이런 담양 일대 누정(樓亭)에는 모두 가사(歌辭)가 얽혀 있다.

면앙정 소개나 기행문에는 면앙정가(人+免仰亭歌)가 반드시 나오고,

식영정(息影亭), 환벽당(環壁堂), 송강정(松江亭) 이야기에는

성산별곡(星山別曲)이 빠지지 않는다.

 

만일 가사(歌辭)가 없다면 담양 일대 누정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면앙정가가 없었다면 면앙정은 오늘 우리에게 대체 무슨 감동을 줄 수 있을까 ?

 

필자는 가사(歌辭) 없는 담양 누정은 그저 무덤덤하게 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 지에 대하여 글을 더 진행해 본다.

 

 

제월봉(霽月峰)

 

2009년 6월 27일 토요일

 

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담양문화원에 들러 개략적 설명을 들은 일행은

버스를 타고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402번지 면앙정으로 향했다.

 

 

저 멀리 산이 빙 둘러 있고 사방은 파란 모가 심어진 판판한 들판인데

버스는 눈깜짝할 새 읍내를 빠져 나간다. 이 글을 쓰며 지도를 찾아

축척을 재니 담양 읍내에서 면앙정은 4km 다.

 

이날 해설을 맡은 분이 일어나 지형을 설명한다.

이 산 저 산 이름을 대다가 정면을 가리켜 제월봉(霽月峰)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면앙정 있는 곳-리(里) 이름이 제월리다.

 

아 저것이 정녕 면앙정가 첫 머리에 나오는 그 제월봉 인가?

 

无等山(무등산) 한활기 뫼히 동(東)다히로 버더이셔

멀리 떼쳐와 霽月峯(제월봉)이 되여거늘

 

이상 면앙정가는 원문-16세기 국어도 아니고 현대문 번역도 아니다.

원문을 그대로 쓰자니 알아 듣기 곤란하고 현대문은 맛이 나지 않아

필자가 적당히 타협했다. 이후 인용은 모두 그러하다.

 

해설하는 분이 가리킨 제월봉은 학교 뒷동산 정도의 야산(野山)이었다.

 

버스를 세워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기에 구글로 담양 읍내에서

제월봉을 바라 보는 화면을 찾아 버티컬로 세워 본다.

(DAUM 지도도 좋지만 방향을 바꾸거나 버티컬 전환 성능이 없다)

 

 

사진 : 구글 담양읍-제월봉, 면앙정

 

이걸 두고 다음과 같이 지었단 말인가?

 

일곱 굽이 한데 멈춰 믄득믄득 버러난듯

가온대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뇽(龍)이

선잠을 갓 깨여 머리를 얹혔으며

너러바회 우헤

송죽을 헤치고 정자를 안쳐스니

구름탄 청학이 천리를 가리라

 

 

면앙정 정자를 세우고 면앙정가 노래를 지은

송순(宋純) (1493-1583)이 후라이를 세게 친 것은 아닐 것이다.

 

내 눈에 보잘 것 없는 토산이지만, 송순(宋純)은

‘늙은 용이 선잠이 막 깬 것’으로 느낀 것이다.

 

이런 눈을 갖추지 않고 면앙정 가 본들

‘거 별 것 없군. 뭐 이런 걸 가지고..’ 할 것은 뻔하다.

 

그런데 이제껏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대체 언제 연단 말인가?

면앙정가 읽으며 송순의 생각을 따라갈 수 밖에 더 있나?

 

이런 까닭에 “면앙정가 없는 면앙정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감히 말해 보는 것이다.

 

 

면앙정(俛仰亭)

 

 

정자는 돌 계단을 따라 올라 가야 한다.

 

 

사진: 면앙정 오르는 계단

 

계단을 2-3분 올라 가면 정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 계단이 끝나고 정자가 보인다.

 

이윽고 정자 앞에 선다.

 

 

사진: 면앙정 정면

사람이 끊어질 때를 기다릴 수가 없어 경치인양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정자는 사방을 텅 비워 놓고 가운데만 방을 들였으니

영남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다.

 

“무등산 한 줄기 동(東)쪽으로 뻗어 나와” 의 그 무등산이 어느 쪽이냐고
물으니 정자를 품고 있는 언덕의 뒤쪽이라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단다.

그럼 구글이나 동원해야지.

 

 

 

 

사진: 구글-면앙정에서 본 무등산

 

 

면앙정에서 들판을 바라보다

 

 

사진 : 면앙정에서 본 앞 들판-나무가 우거져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러면 고건축 하는 사람들 화낼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 면앙정 건물이야 뭐 그리 대단한가?

 

서양이나 중국의 웅대한 고적을 돌아 보고 온 사람이면

우리 조상들은 왜 이렇게 초라한 유산 밖에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나 품지 않을까?

 

필자는 한국 누정(樓亭)이나 원림(園林)의 가치는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와 그곳에서 바라보는 경관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해 예원(豫園)에 갔을 때 느낀 것은 그 규모는 웅장하여 우리나라

대궐 수준이나 모든 것이 담 안에 갇혀 있는 인공일 뿐 자연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한다면 우리나라 누정과 원림은 거의 화장실 수준 밖에 안 되겠으나

눈에 들어오는 산천이 모두 그의 일부 인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 담당 관청은 건물은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애써  복원하려 들면서도 정작 주변 경관에 대하여는 무신경하다.

 

저 면앙정 앞을 가리는 나무.

다 베자는 것이 아니라 가지만 몇 개 쳐 주어도 앞을 볼 수 있을 텐데.

면앙정에서 경치를 바라보지 못하면 무엇이 남나?

 

여기 뿐이 아니다.

시민에게 돌려 주니 뭐니 생색내던 숙정문도 막상 가면 우거진 나무 때문에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다. 숙정문에서 경치를 빼면 최근 복원한 문루야

뭐 볼 것이 있는가? 문정숙(門靖肅)이라 쓴 현판이나 감상하나?

 

문루복원에는 예산이 제법 들었을 테지만 나무 가지 몇 개 치는 데는

돈 몇 푼 안들 것이다. 이상한 것은 돈 드는 일은 기를 쓰고 하는데

돈 들지 않는 일에는 무신경하다.

 

면앙정가에서 정자 앞 조망 부분은 이러하다.

 

정자압 너븐들에 올올히 펴진드시

넙거든 길지말고 프르거든 희지말고

쌍룡이 뒤트는듯 긴깁을 펼친듯

어드러로 가노라 무삼일 바빠서

달리는듯 따르는듯 밤낮으로 흐르는듯

물따른 모래밭은 눈같이 퍼졌거든

어즈러운 기러기는 므스거슬 어르노라

 

 

정자 앞 들판은 여전히 넓지만 온통 투명 비닐하우스로 뒤덮여 있다.

영산강 발원지에서 내려 온 앞 냇물은 송순의 눈에는

‘쌍룡(雙龍)이 뒤틀어 긴 비단을 펼쳐 놓은 듯’ 했다지만

지금 내 눈에는 쨀쨀 거리기만 할 따름이다.

 

이날 해설하는 분은 송순 당시와 지금의 냇물이 달라지고 수량이 어쩌고

애써 설명하려 들지만, 앞 냇물의 수량이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냇물은 그렇다 하더라도 제월봉이 그 당시에는 훨씬 높았단 말인가?

제월봉을 선잠이 갓 깬 늙은 용이 머리를 얹힌 것으로 보았다면

앞 냇물 수량에 관계 없이 쌍룡이 뒤트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사진 : 구글로 본 면앙정 앞 경관

 

 

면앙정( 人+免 仰亭) 현판(懸板)

  

 

 

 

 

사진: 면앙정 현판

 

+免이 구부린다는 뜻 일 때는 음(音)이 ‘’이 아니라 ‘’다.

구부려 볼 (俯)와 같은 뜻에 같이 발음해야 한다.

따라서 ‘면앙정’이 아니라 ‘부앙정’이 맞다 라는 주장이 있다. 

 

시비의 소지가 어느 정도 있다고 보지만

모든 사람이 면앙정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바꾸나?

 

또 시비의 여지는 있지만 그 주장-‘부’라는 주장이 꼭 옳은 것 같지는 않다.

이 부분 글이 길어 질 것 같으니 나중에 글 꼭지 따로 만들기로 한다.

 

 

면앙정(俛仰亭) 삼행시

 

 

사진: 면앙정에 걸린 삼행시

 

위 삼행시를 풀면 다음과 같다.

 

면유지 앙유천 (+免 有地  仰有天)

굽어보면(俛) 들판이 있고, 우러러보면(仰) 하늘이 있다

 

정기중 흥호연 (亭其中 興浩然)

그 한 가운데에 정자가 있으니 흥취가 호연하다

 

초풍월 읍산천 (招風月 揖山川)    

바람과 달을 초청하고 산천을 끌어 들여

 

부려장 송백년 (扶藜杖 送百年)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 년을 보내리라

 

이 시의 첫 구절 ‘면유지 앙유천’ 에서 한 글자 씩 따서 정자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 본다는 말은 유가(儒家)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이야기 한 군자의 세가지 즐거움 (君子有三樂) 중

두 번째 즐거움 (二樂)이 다음과 같다.

 

앙불괴어천 (仰不愧於天) 하늘을 바라보고 부끄러움이 없고

부부작어인 (俯不작於人) 땅을 굽어 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 

 

군자의 세 번째 낙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득천하영재이교육

(得天下英才而敎育)이니, 학교 같은 데서 글씨로 써서 붙여 두곤 했다.

 

천지 간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공명정대하다는 것이야 말로

조선조 사대부들이 애써 구하던 바였다.

 

세계가 깜짝 놀란 조선조의 기록문화도 실은 공명정대하게 처신했으니

한 점 숨김 없이 다 밝혀 두고, 또 다 밝혀야만 공명정대 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 중기 호남 사림의 대표 격이었던 송순(宋純) (1493-1583)이

정자를 지으면서 이 하늘을 올려다 보고 땅을 굽어 본다는 구절을 따

이름을 면앙정(人+免仰亭)  이라고 붙인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사진 : 정자에 걸려 있는 면앙정기(俛仰亭記)

전문을 올리면 글씨가 작아져 읽을 수 없을 듯 하여 앞 부부만 올린다.

 

면앙정 세운 경위를 적었는데 끝 부분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지었다고 써 있고 그 위에 문헌공이라고 붙여 놓았다.
스스로 호도 밝히고
시호도 붙일 수는 없었을 테니,

글을 짓기는 기고봉(奇高峯) 일 테지만 쓰기는 후세에 써서 붙인 것이다.

 

 

사진: 차운(次韻) 중 양산보가 지은 것

양산보(梁山甫) (1503-1557)란 그 유명한 소쇄원을 지은 인물이다.

 

 

 

사진 : 회방연도(回榜宴圖)-가사문학관 전시

 

 (그림 설명)

면앙정을 세운 송순이 나이 87세가 되던 해는 (송순은 만 90, 우리나이로

아흔 하나 까지 살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이때 면앙정에서 축하하는 잔치가 열린 것이 회방연(回榜宴)이다.

 

당시 선조 임금도 축하하는 꽃과 술을 내리고

전라감사 송인수를 비롯한 많은 하객들이 줄을 이었다.

 

잔치가 마무리되고 밤이 되자 송순은 처소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때 수제자인 송강 정철이 제안을 한다.

스승 송순을 제자들이 뚜껑 없는 가마에 태우고 모시자는 것이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등이 맞장구를 쳤다.

이에 이들이 직접 가마에 스승 송순을 태워 숙소로 모신다는 그림이다.

 

대강 보고 내려오는데 면앙정과 올라가는 길은 사람으로 몹시 붐비지만

약간만 길을 벗어나니 대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물어 그윽한 기분이 난다.

 

 

사진: 대숲-면앙정 부근

 

대 숲에는 죽순이 돋아 있다.

 

 

사진 : 죽순

 

이상

 

추기(追記)

 

면앙정 주인 송순의 일생에 대하여는 인터넷 검색하면 무수히 쏟아지니 따로 적지 않았다.

 

.. 하나 더.. 이번 답사를 안내했던 분에 의하면

 

면앙정 송순은 황진이 하고도 관계가 있지 않았겠느냐?

하여튼 같은 시대에 산 것은 틀림없다.

황진이가 영산포까지 여행했다는 설이 있는데

송순과 사랑의 여행을 했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이런 말씀을 하신 바, 뭐 아니라는 증거도 없고….

 

송순은 90을 넘겨 산 복노인(福老人)에 풍류남아였던 것 같으니

절세가인 황진이와 엮어서 상상해 볼 만 하지만 그건 소설가의 영역이다.

 

담양 일대 누정 주인들과 누정에 출입하고 노래한 사림(士林)들은 모두

스승 제자, 사돈, 장인 사위, 동문수학 친구 관계로 거미줄 같이 얽혀 있다.

 

한 두 사람 들을 때는 알 것 같다가 세 사람 넘어가니 어지럽다.

필자 머리가 나쁘기도 하지만 수학에서도 변수 셋 이상이면

방정식(方程式) 풀기 만만치 않은 법이다.

 

이 담양 일대 누정을 둘러 싼 사림(士林)들 관계를 정리하려도

본 글의 분량이 인터넷에서 글 읽는 사람들 인내심 한계를

이미 한참 벗어 난 것 같아 나중에 글 꼭지를 따로 잡기로 하고

이 글을 끝낸다.

 

 

사진: 면앙정가 석비-죽록원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