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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난슬

하늘벗삼아 2015. 11. 24. 10:06

[인터뷰] 몽환적인 목소리의 새로운 싱어송라이터의 탄생... "음악에는 주술적 힘이 있어야"

[오마이뉴스 이언혁 기자]



"네 음원이 세상에 발표됐구나. 네가 음악을 만들고, 음원이 공개된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다."

정새난슬의 첫 앨범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이 공개된 지난 3일, 엄마인 박은옥은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음악을 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딸이 아빠인 정태춘과 호흡을 맞춰가며 음악 작업을 하고, 창작물을 세상에 내놓는 과정을 오롯이 지켜봤던 엄마는 벅찬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딸이 만든 곡을 처음 듣고 "슬이가 노래도 만드네"라며 놀랐던 아빠는 편곡에 참여하며 딸과의 합의점을 찾았다. 

부모님이 모두 가수였지만, 정새난슬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은 내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처럼 바이브레이션 있는 미성을 갖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빠처럼 작사, 작곡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다는 생각에 '나는 가수를 못한다'는 콤플렉스가 일찌감치 그를 짓눌렀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던 그는 왜 마음을 바꿔 음악을 하게 되었을까. 지난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정새난슬을 만났다. 

"음악을 듣는 것 자체는 좋아했다. 변화의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재미삼아 기타를 배우고, 일기를 쓰듯이 노래를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가 작사·작곡하는 것을 봤던 게 영향을 끼쳤나 보다. 그렇게 쓴 곡이 점점 많아졌다. 내게 음악은 자기고백이자 감정을 담아두는 일기장 같은 역할을 했다. 나 자신을 위로하고 기록하는 역할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점점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아무리 개인적이라고 해도 한 번 발표는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평소 지론 "매력은 없지만 마력은 있어야"

▲  정새난슬의 첫 EP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의 재킷
ⓒ 디컴퍼니


정새난슬의 앨범에는 5곡이 담겨 있다. '클랩함 정션'은 영국의 기차역 이름이다.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은 런던 유학 시절의 이야기를 이 기차역에 담은 타이틀 곡이다. 앨범에는 최면을 거는 듯한 분위기의 자장가 '쉿', 자신의 연애사를 담아낸 '아기가 되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에 대한 곡인 '김쏘쿨' 등이 함께 실렸다. 인트로 '엄지 검지로'를 "지난 결혼생활의 축약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 그는 이 곡을 가장 마음에 드는 곡으로 꼽았다.

"맥에 있는 '개러지밴드'라는 프로그램으로 녹음을 처음 시작했다. 악기를 못 다루니까 내가 편곡할 수 있는 도구가 목소리밖에 없더라. 그래서 되게 여러 가지 목소리를 냈다. 아카펠라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색을 다르게 해서 편곡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뮤지션이에요' 하기에는 부끄러운 것 같다. 음악적 완성도 같은 것은 고민하지 않고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서 만드니까 쉽게 하는 거지. 고민하시는 분들과는 비교가 안 될 거다. 내게는 그림이나 음악이나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멜로디와 어우러지는 정새난슬의 목소리는 몽환적인 느낌 그 이상이다. 마치 주문을 거는 듯하다. 평소 "매력은 없지만, 마력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는 그는 함께 편곡한 아빠에게도 "음악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심지어 산전수전 다 겪은 음악적 대선배 격인 아빠에게 "(아빠의) 멜로디는 아름답지만 상투적이다"고 직설적인 지적을 하기도 했던 '주관이 뚜렷한' 딸이다. 하지만 아빠는 어느새 그가 "계속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든든한 음악적 동료가 되었다.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이혼하고, 친정으로 왔다. 뭔가 바뀐 상황에 대해 치유할만한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아빠와 같이 작업하면서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뚫고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주관적으로, 자조적으로 바라본다. 개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늘 내 버전의 이야기만을 할 수 있는 거니까. 나는 아이러니 자체를 좋아한다. 박살난 결혼 같은 과거의 아픈 기억도 오히려 경쾌하게 담아낼 수 있는. 아빠가 정말 슬프게 편곡해서 빼버린 곡도 있다."

몽환적인 느낌 그 이상의 목소리

정새난슬은 정규 앨범 발매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오는 2016년 3월에는 에세이도 출간할 예정이다. 인터넷에 연재하던 에세이를 보고 한 출판사가 출간을 제의한 것. <다 큰 여자>라는 제목으로 낼 이 책에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타투를 한 여자로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들어갈 예정이다. "그 와중에 이혼까지 추가돼서 불량한 여자의 에세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너스레를 떤 정새난슬은 "다 큰 여자로서 욕망을 이야기하는 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누군가의 애인이었다가, 결혼해서 아내였다가, 지금은 이혼녀이고 싱글맘이다. 또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가, 음악을 하고, 부모님의 딸이기도 하다. 수많은 자기규정 사이에서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나를 보니까 수많은 이름이 싫더라.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싫고, 힘들더라. 한 가지로 규정될 만큼 어느 하나에 뚜렷한 두각을 나타낼 만큼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한 가지로 자신을 규정하기보다는 다 큰 여자라는, 닫히지 않은 괄호 같은 상태가 되려고 한다."

불길하고 음습하게 들리지만 계속 끌리는. 정새난슬의 음악은 이상하지만 궁금한 그런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상투적이지 않고 솔직한 음악을 할 계획이다. 유기견의 마음을 사람에게 빗대어 쓴 '개 같은 년'을 언급하면서 그는 "단어는 세지만 감정은 여린 아이러니를 좋아한다"고 미소 지었다.

최근 딸 서하를 보며 좋은 엄마, 모성애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는 정새난슬은 "내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으니, 나를 건너서 딸에게 가지 않았을까"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그토록 거부했던 자신도 어느새 부모님처럼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니, 딸에게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울러 정새난슬은 "아빠가 고등학교 때 만든, 사춘기의 감성이 담겨 있는 노래를 좋아한다"면서 "단순하고 몽환적인데 사람들은 거의 모른다. 그런 곡들을 다시 불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대체로 '박은옥씨 목소리 정말 좋아요'라고 하는데 나는 지금 아빠의 목소리가 정말 좋다. 아빠와는 워낙 격의 없는 사이니까 이렇게 표현하자면, 늙은 남자의 목소리랄까. 기타와 아빠의 목소리만 있어도 진짜 좋다. 외려 엄마는 고운 목소리지만, 아빠의 목소리는 골동품처럼 닳고 닳아 투박하면서도 원숙해서 매력이 있다고 할까. '앨범 하나 더 내야 한다'고 계속 설득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