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역사

자유시 참변 - 스보보드니 [Svobodny]

하늘벗삼아 2014. 6. 20. 21:23






Svobodnyj라고도 씀. 옛 이름은 Alekseyevsk(~1924). 러시아 연방 아무르 주의 구의 행정중심도시. 아무르 강의 지류인 제야 강 우안에 있다. 시베리아 횡단 철로변에 있으며 1912년에 건설되었다.
오늘날 이곳은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해 철도작업장이 있으며 아무르 강 기선함대의 작전 및 정비 기지의 역할도 한다.
조선업과 금속세공업 등도 발달했다. 스보보드니는 바이칼-아무르 기준(BAM) 철도의 한 철도역인 페브랄스크와 간선도로로 연결된다. 인구 81,400(1991).


스보보드니(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였다가, 이후에 스보보드니로 바뀌었고, 한국인들은 의역을 하여 자유시로 불렀다.

 

자유시 사변,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7일에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이만시, 알렉세예프스크, 스보보드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 레닌의 적군(Red Army)이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조선 독립군들을 포위, 대부분이 사상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강제노역소로 끌려간 사건이다.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집결하였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모두 괴멸된 사건이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스보보드니(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였다가, 이후에 스보보드니로 바뀌었고, 한국인들은 의역을 하여 자유시로 불렀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이동 중에 미산에서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으며, 독립군은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지휘권을 둘러싸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가 대립했다.

 

 이사건으로 독립군은 대부분이 상하이파(이동휘)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볼셰비키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의용대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다른 견해에서는, 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적군(소련군)과 백군(반혁명군)의 내전에서 적군을 도왔는데, 이것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비극의 내력]

* 1918년

(1) 11월 11일 -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

(2) 시베리아에 출동해서 구 제정-러시아의 백군과 협력하여 레닌의 적군과 싸우던 미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그 외의 연합군이 철수함

(3) 일본 국회가 러시아에서 일본군을 철수하기로 결의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1) 일본은 소련의 붉은 혁명을 일본에 수출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레닌과 화친조약을 맺음

(2)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조선 항일 무력단체들을 토벌하기로 함

(3) 일본군 19사단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군을 공격.

 

* 1920년

(1) 6월 - 봉오동 전투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이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싸워 크게 이김. (2) 10월 21일 -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침. 일본군 21사단은 남쪽의 서로군정서군을 공격.

(3) 연이어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 개시함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킴. 병력은 약 3,500명 정도

(4)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모음

 

 

* 수많은 부대가 총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장악과 관련한 권력투쟁이 발생함

 

** 1921년 6월 27일

- 레닌의 적군이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함. 자유시 참변 발생. 탈출한 사람은 드물고, 분산되었던 조선의 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었다가 레닌의 적군에 모두 사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강제노역소로 끌려감. 적군의 총부리에 몰려 만주로 넘어가기 위해 깊은 제나강을 건너던 수많은 젊은 독립군들은 모두가 제나강에 빠져 죽었다. 우리의 손으로 이룰 대한독립이 사라져간 비참한 사건이었다.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거의 모두 와해되버렸으니 ....

이후로 조선 독립군 운동이 막을 내렸다고해도 과언은 아닌것이다. 오호애재여 ~.....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라는 걸출한 이론가가 살아 있었더라면......

 

레닌이 아시워했던 1921년 자유시 참변, 그리고 일본과 타협하기위해 벌렸던 1936년 조선인 전체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정책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던 독립군과 그 기반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참조 자료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j2448a 자유시 참변 - 1 제나강의 애사(哀史) -2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한국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몇 해 동안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적군)와 멘셰비키(백군)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과 외국의 무력간섭이 겹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1918년 4월에는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20만 명의 한국독립군은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파에 가담했고,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했다. 이 한인의병대는 일반적으로 이만군대·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인 무력군으로, 이만군대 사령관에는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김덕보였고, 다반군대 사령관은 최니콜라이였다.

 

이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흑룡주정부가 극동공화국으로 강화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시로 집결했다. 한편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은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감행했고, 간도방면에서는 일본군이 한국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한인부락을 닥치는 대로 방화·살상했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일본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여 노령(露領)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동중 일단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재편성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각기 소속 부대별로 이동해서 비교적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지금의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했다.

당시 연해주에서는 이전부터 거류했던 자유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했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시베리아와 간도로부터 한인무력이 자유시로 집결해, 간도지역의 한인무력으로 최진동·허욱 등의 총군부군대, 안무·정일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이청천 등의 독립군과 김좌진·서일 등의 군정서군대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이만군대·다반군대·이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군대 등이 있었다.

 

총병력수는 1,900여 명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한인무력군통수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이리아는 군통수권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이때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그리하여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이를 접수한 한인부는 다시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이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지정했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다가 장교들이 체포당하고 기관포와 대대문서를 압수당하는 등의 횡포에 못이겨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주했고, 이주 즉시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 인도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력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의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채성룡으로 임명했다. 이무렵 이용·박이리아 등은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와서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한인무력군 통수권을 위해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고 이제부터는 실력으로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동공화국 군무총장에게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당했다.

한편 1921년 5월 23일 고려군정회의의 갈란다라시윌린 일행이 치타를 출발하여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해보니 옛 이항군대·총군부군대 · 독립단군대 · 다반군대 · 국민군대·이만군대 등 1,400여 명이 사할린 의용대 라는 이름으로 1개 연대를 편성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고려군정의회의 산하에 들어오고 있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오늘부터 자기가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사명을 역설하며, 6월 8일 박이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이리아는 이를 거부했지만, 홍범도 ·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고, 이후 사할린 의용대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이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갈란다라시윌린에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 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 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 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총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 의용대는 전사자·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