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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하늘벗삼아 2013. 11. 16. 12:57

 

'흥청망청'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미녀와 기생들을 관리하게 했다.명칭도 기생에서 운평(運平)으로 바꿨다.

또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양성소로 개편하고,오늘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도 학생들을 내쫓고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렸다.전국을 이처럼 접대부 양성소 및 대기소로 만들어 놓고 눈에 드는 운평은 대궐로 불러 들였다.

궁중에 들어가면 명칭이 흥청(興靑)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다.그러나 흥청이라고 다 같은 흥청이 아니었다.임금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天科)흥청이라 하여 급수를 높였다.그렇지 못한 흥청은 반대로 지과(地科)흥청에 머물렀다.

벼슬아치나 선비들로 하여금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메게 했으니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다.그런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청들과 놀아났다.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다니지 않나,반대로 자기가 그녀들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겼다.그도 모자라 민간 유부녀도 이쁘다는 말만 들으면 불러다 함부로 겁탈하고,심지어 큰 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성추행했다.

그 결과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좌에서 쫓겨나고 목숨을 잃었다.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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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흥청망청[興淸亡淸]?

->흥청이 '나라를 망치는 청'이란 뜻.흥과 망의 글자를 대조해 써서 비웃은 말.

 

2.어원에 대한 시대.

때는 연산군.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에게 투기심이 높은 어머니가 쫓겨나고 대신들의 건의로 죽은 일까지 알게된다. 그 후 연산군은 삐뚤어져가며 당시 후궁이였던, 정 소용과 엄 소용을 죽이고, 그 자식들을 데려가 할머니 인수대비에게도 쇼크를 주게 된다. 연산군은 어미가 억울하게 죽었다 하여 '제헌'이란 칭호를 내려준다. 이렇게 어머니의 복수를 끝난 연산군은 폭정이 날이 갈 수록 극에 치닫게 된다. 그는 왕이라는 권한이란 것을 이용하여

막강한 정치를 휘두른다. 그는 전국의 기생 중 요즘 '얼짱','몸짱' 인 퀸카들만 100명으로

골라 궁궐로 불러들인다. 처음에 불러들인 이 기생들은 운평(運平)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에 성이 않차는지 벼슬아치의 첩,창기 가운데서도 운평을 추가하게 된다.

이 운평의 수가 1000명에 달했다 하는데 얼마 안 가 9천여명에 달하게 된다고 한다.

요즘 고1부터 시작된 내신 9등급처럼 운평에게도 9등급을 매기게 된다. 이 운평들 중에

처음에 온 운평들은 가흥청(假興淸)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또 이 가흥청들을 한 등급 승격시켜 '흥청망청'의 주인공인 흥청(興淸)으로 승격시키게 된다. 이 때 뒤에 들어온자들은 속홍(續紅)이라고 했다.

 

3.흥청은 뭘 했을까?

흥청들은 두 종류로 나뉘게 된다. 임금 곁에서 모시는 자는 지과(地科)흥청, 잠자리를 같이하는 자는 천과(天科)흥청이라고 구분하였다. 장악원의 고친 이름인 계방원(繼芳院)에서 운평을 관리했다. 흥청들은 원각사에 둔 연방원과 궁궐 안에 둔 취홍원에서 거처했다.

그밖에 종실 등 여러 개인 자택을 빼앗아 함방원, 뇌양원, 진향원이라 하고 그곳에 흥청과 광대를 살게 했다. 지방에도 운평을 뽑아두었다가 서울에서 소요되는 숫자를 채웠다.

운평은 비록 예전 지아비라해도 간통을 금했으며 임신까지 하면은 지아비는 참수하고

아이는 땅에 묻어버렸다. 운평에게 들어가는 식량과 옷, 화장품 등의 경비를 모두 궁중 예산으로 들어갔으니 엄청난 국비 손실이다.

 

1505년 삼월 삼짓날, 경복궁 후원에서 자순대비를 모시고 외명부를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외명부들은 옷깃에 지아비의 성명을 써서 달았다. 이 자리에는 운평 천여명이 동원됬는데 이 때 주지육지처럼 술 고기 춤 노래가 흐드러지자 사람들은 '흥청망청'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연산군은 채홍준사(採紅駿使)라 하여 전국 각지에 아름다운 여자와 좋은 말을 찾아내게 하였고,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채청사(採靑使)를 보내 어린 처녀들을 색출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