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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붕당정치(朋黨政治).

하늘벗삼아 2013. 3. 10. 16:33

조선의 붕당정치(朋黨政治)

훈구세력과 사림의 등장

조선왕조는 개국 이후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제를 바탕으로 한 훈구(勳舊)세력에 의한 정치체제였다. 그러다가 제9대 성종 대에 이르러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한 사림(士林)들이 중앙정치로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종이후 연산군과 훈구세력에 의해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를 당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고 사림파들은 대부분 관직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폭정과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던 연산군은 훈구세력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중종반정이후 처음에는 반정에 참여한 훈구세력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훈구세력이 중심이었던 영의정 박원종이 죽자 훈구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때 중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다시 등용하였다. 또한 중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개혁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림파인 조광조를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조광조에 의해 사림의 세력은 훈구세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훈구세력이 조작한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으로 또다시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를 맞아 세력을 잃게 되었다.

사림들은 중종이후 인종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지만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또다시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를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네 번의 사화를 당하면서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선조 대에 이르러 다시금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훈구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사림의 분열과 붕당정치의 전개

①동인과 서인

1575년(선조 7년) 하급관리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吏曹銓郞)이라는 직책을 두고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이 다투게 되었다. 이 다툼을 계기로 사림은 동인서인으로 분열하였다.

동인은 주로 퇴계 이황과 조식에게 학문을 배운 영남지방 출신이었고, 서인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같이 한 기호기방 출신들이었다.

②동인에서 갈라진 남인과 북인

동인과 서인이 다툼을 벌이던 중 서인의 대표였던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때 동인은 ‘서인이 광해군을 세자에 앉히려고 선조가 사랑하던 후궁 인빈과 인빈이 아들 신성군을 죽이려한다’고 소문내어 서인을 몰아내었다.

이 일로 정권이 다시 동인에게 넘어가자 동인은 정철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강하게 처벌하자는 북인과 가혹한 처벌을 반대하는 남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북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였고 남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였다.

③북인의 분열

임진왜란 중에 화친을 주장했다는 명분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대북파와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소북파로 분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고 세상은 이제 대북파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④서인과 남인의 대립

서인과 남인은 힘을 합쳐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처음에는 남인과 서인이 서로 협력하며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새 어머니 자의 대비의 상복 문제로 서인과 남인은 본격적으로 대립하였다. 상복 제도에 따르면 첫째 아들이 죽었을 때는 3년복을 둘째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소현 세자가 일찍 죽어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자의 대비가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윤휴와 허목 등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이어 첫째 아들이나 다름없으니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의 논란을 기해예송이라고 한다.

1674년 효종의 아내인 인선 왕후가 죽자 똑 같은 논란이 다시 일어났는데 이것을 갑인예송이라고 부른다.

⑤청남과 탁남으로 분열된 남인

갑인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처벌을 두고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청남과 온화한 처벌을 주장하는 탁남으로 분열되었다.

또한 남인의 대표이던 영의정 허적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에 궁에서 쓰는 천막을 가져다 쓴 일로 인해 숙종은 허적을 비롯한 남인을 내몰고 서인에게 정치를 맡겼다.

⑥서인의 분열

남인을 몰아낸 경신환국 이후 남인의 죄를 다스리는 문제를 놓고 서인이 또 분열하였다. 남인을 강력하게 처벌하자는 송시열, 김익훈 중심의 강경파 노론과 이에 반대하는 한태동,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졌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후 약 10년 동안 나라의 주도권은 노론이 가지고 있었다.

-세계일보(2008.04.22)-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과 붕당정치의 종식

영조는 탕평책으로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하였으며 이후 노론, 소론, 남인, 소북파 등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한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과 개혁정치로 붕당정치의 종식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 시대에도 여러 붕당이 형성되어 있었고 여러 가지 붕당적 사건이 있었다. 그러다가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시작으로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250년 이어온 사림의 붕당정치가 끝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