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흔적

동백림사건요? 코미디였지요

하늘벗삼아 2012. 11. 18. 11:48



“동백림사건요? 코미디였지요”

‘역사의 비극’30돌, 관련자들 씁쓸한 회고
“우린 국가테러리즘의 희생자”

 

 

    『저는 카프카의 「 심판」의 주인공 K의 상태에 있습니다. 저를 더이상 찾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한 국으로 갑니다』

    카프카를 즐겨 읽던 한 독문학도가 어느날 아침 소설 주인공 K와 똑같이 하숙집에서 건장한 낯 선 사내에게 체포됐다. 그의 이름도 K였다.

    납치처에서 어찌어찌 감시인으로부터 종이를 얻어 하 숙집 여주인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 찾지말라」고 편지를 한번 쓰는 것이 납치자들에게도 유 리할 것이라고 설득,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이 글은 서방통신을 타고 동백림사건을 세상에 알리 는 중요한 단서가 됐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67년 6월17일. 그날 밤 독일 본(Bonn)의 한국대사관에 감금된 상태 에서 편지를 쓴 김종대(金鍾大·당시33세·하이델베르크대)씨가 바로 「 제2의 K」였다.

    곡절많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씨는 독문학 교수로 자리 잡았고 지금은 단국대 문과대학장. 고운 외모에서 한세대 전 사건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하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써 한 세대 전의 일이군요. 우리가 처했던 상황과 당시 지식인들의 「 의무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있을까요』

    그의 말처럼 이제 「 동백림사건」이라는 제목 이외에 그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따라서 수십명의 K들이 당시 분단한국의 「 고통」을 어떻게 「 지식인의 의무감」으로 정리해냈었는 지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북한사람 만났다고 간첩 올가미 씌워
 

그러나 바로 이 대목, 젊은 K들이 겁없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왕래하고 심지어 평양까지 오 갈 수 있게 만든 사회적 정서적 분위기, 그리고 이들에 대한 당국의 고식적 대처방식 등을 파악 하는 일은 한 세대 뒤 북한관련 확신범들이 양산되는 오늘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

    당사자들은 대부분 「역사의 비극」이자 「 희대의 코미디」였던 이 사건을 기억해내고 싶어하지 않는 다. 대개 60대 노년에 접어들고서도 옛일을 회상하는 것이 두려워 서로 연락을 끊고 산다는 이들 은 「 NEWS+」의 요청에 어렵사리 운을 떼면서 이렇게 입을 모았다.

    『관련자 중의 어느 누구도 간첩이 될래야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실제 그런 행위를 한 적도 없다』

    따지고 보면 절규에 가까운 신원(伸寃)호소다. 물론 정밀검토를 거칠 일이다. 다만 「 50년대말-60 년대초 독일, 프랑스 유학생으로서 동베를린 또는 평양을 오간」 실정법위반 사실에 대한 인정(認定)과 「 그러나 북한편에 서서 반국가행위를 한 적은 없다」는 부인(否認) 사이에 놓인 아슬아슬한 거리가 눈길을 끈다. 이들의 결심 동기를 들어보자.

    『우리 세대에 통일을 못 이루면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패전국 일본은 「 소 니」가 유럽에 진출하는 등 엄청나게 발전하는데 우리는 무슨 죄가 있어 남북이 갈려 으르렁거리 느냐는 울분이 컸지요. 여기에, 통일을 위해선 공산주의를 직접 알아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겁니 다』

    사건 당시 프랑스 그레노블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동국대에 출강하던 조영수씨 (당시 34세)의 회고다. 동베를린을 세차례, 평양을 두차례 왕래한 죄값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지금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김종대씨의 설명은 조금 더 논리적이다.

    『하이델베르크에 가니 30여명의 라이프치히대(동독 자매대) 유학생이 있더군요. 우리는 그쪽 사람 접촉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주눅들어 있을 때인데 이들은 자기 체제의 약점과 상대의 문제들을 서슴없이 토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이게 지성이구나」생각했지요. 또 5·16에 대해 당시 독 일 언론이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어차피 남북 정부는 당장 대화할 것 같지 않고 우리라도 동 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냉면 얻어먹으러 가자”북한대사관 우발적 방문

당시 독일유학생 상당수가 서울문리대 출신들로서 특유의 「 리버럴」한 분위기가 『북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질 때 만나지 않는 것은 지식인의 죄악』이라는 의식을 형성하는데에 일조했다고 김씨는 부연한다.

    윤이상씨와 함께 같은 비행기로 6월18일 독일에서 한국으로 납치됐던 김택환(金宅煥·당시3 6세 ·뮌헨대 정치학)씨 경우는 자유분방하다 못해 어처구니없을 정도다.

    『두번째 북한대사관 방문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박성조씨(현 베를린자유대학 교수) 등 4명과 서베 를린에서 모여놀다가 북한사람들 냉면이나 얻어먹으러 가자는 우발적인 제안에 휩쓸린 겁니다』

    실제로 그는 북한대사관원의 집에서 실컷 저녁 잘 얻어먹은 뒤 『화장실에는 왜 김일성초상이 없 느냐』는 등 도발적 언사로 혼쭐나기도 했다.

 

    확실히 「 학구적 관심」에서 북한 사람들과 접촉한 경우도 있다. 서울대상대 조교수이던 강빈구씨 (당시 35세·프랑스 디종대 법학박사)는 당시 「독일연수 중인 김일성대 교수」를 자임하는 북한 공작원과의 토론, 그때 얻은 이론서적 10여권 등을 토대로 「 리베르만논쟁과 실제」라는 장문의 논 문을 66년 발표, 호평을 받았다. 이는 형량을 무기징역에서 10년으로 낮추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도 했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사건에 연루됐던 대부분의 유학생들(강빈구, 정하룡, 조영 수)은 서로 잘 어울리던 경기고 동문들이자 대그룹회장의 동생 또는 명문대 총장의 아들 등이어 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별 부러울 것이 없던 인물들.

    조영수씨는 당시 자신들의 행동을 오늘의 관점에서 「 과대망상」으로 치부해도 좋다고 말한다. 다만 동베를린에서건 평양에서건 북한 당국자들과의 접촉은 뚜렷한 「 교육효과」를 낳았다는 것.      『결과라면 견문을 넓힌 것과 대개 북한 체제, 북한식 사회주의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점이지요』

    분명히 사건의 배후에는 북한의 「 공작」이 있었고 그것이 「 울분의 민족의식」 또는 다양한 관심을 갖고 있던 이들 젊은이들과 접촉을 성사시키는 데까지는 효과를 거두었지만 궁극적으로 자기들 사람을 만드는 단계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낸 셈이다.

    요즘의 「 맹목적 주체사상 편향」과는 단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기다.

 

    중앙정보부로부터 이 사건을 넘겨받아 기소를 담당했던 당시의 함정호검사(현 대한변협회장)는 최근 『동서 접촉이 자유로운 서유럽에서 동포인 북한 사람들과의 접촉에 별로 죄의식을 갖지 않 은 이가 있었고, 「 국내에서 알랴」하는 안일한 생각과 호기심에서 접촉한 사람도 많았다. 몇몇은 민족의식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넓히기 위해 행동하기도 했다』고 동기의 다양성을 인정했다.

    나아가 당국의 처리결과에 대해 그는 『반공법이 엄할 때이긴 했으나 외국 주권을 무시하고 유학 생 등을 납치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소추 기준과 판결도 너무 가혹한 점이 없지 않다』고 완 곡하게 문제점을 인정했다.

    한 세대 전 이 K들을 납치와 고문의 무지막지한 국가 테러리즘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고 사형의 문턱까지 몰고갔던 당국의 태도가 오늘 대학사회의 맹목적 북한지향성을 길러낸 출발점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주장일까.



〈김 창 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