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해로(百年偕老)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1909 평북 용천∼1995) 박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1950년 12월, 6:25 동란 중,
평양 의과대학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다가
어쩔 수 없이 국군 버스를 타고서 국군 장병들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인 김봉숙 여사와
또 다섯 자녀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늘
빛 바랜 가족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계속 혼자 살았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으로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다가
끝내는 만나지 못하고
1995년 성탄절 아침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병원비 못낸 환자를 뒷문으로 빼돌린 병원장
한 입원환자가 병원장 문을 드두렸다.
"원장 선생님,
선생님이 성심성의껏 진료해 주신 덕에
완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환자는 치료비와 약값이 없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원장은 재빨리
병원 뒤로 환자를 데리고 나가
비상문을 열었다.
"지금 바로 이 문으로 빨리 나가시오"
집에서 푹 쉬면서 이 약을 먹으면 좋아질 것이니
잘 챙겨가시고 내가 보내줬다는 말은 해서는 안됩니다."
다음 날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입원환자가 병원비를 내지 않고 도망갔기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라
병원 운영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걱정소리가 드높았다.
이렇게 가난한 환자를 병원장이
계속 도와주고 있었으니
병원은 재정이 악화되었고
병원문을 닫아야할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원장 제자가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 소리 듣습니다."하면서
원장을 나무랐다.
그러자 원장은 껄껄 웃으면서
"내가 바보 소리를 들었다면
내 경영은 성공한 거야.
바보 소리 들으면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
이 사람이 평생을 가난한 환자를 위해 바친
장기려 박사다.
그가 남긴 재산은 거의 없었고
이 마저도 자신을 돌본 간병인과
친척에게 돌아갔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언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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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아픔 삭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 살다간 참의사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통해 仁術을 펼친 명의 장기려, 그는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민족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 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신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신 앞에 한 이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
장기려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켜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박사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장기려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장기려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서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주었다. 자기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양 시절 그의 부인은 장기려가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가운과 환자복 삭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날 것이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절대빈곤시절의‘천막 무료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 의료조합’까지, 그것은 그의‘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했고, 그렇게 살았다.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을 재조명한다.
KBS http://www.kbs.co.kr/1tv/sisa/manhistory 에서 퍼옴
오늘날 대형교회가 세습 체제처럼 자식들에게 재산 상속하듯 물려주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이 모습은 북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 권력 상속 체제를 닮아가고 있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돈과 부동산에 심취 해있습니다.
부동산 투자 잘해 바벨탑처럼 교회 십자가 높이 세우면 이 시대에 인정받는 목사가 되는 세상
오늘 날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은, 앞서가신 지도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 성자라고 불렀던 한경직 목사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님…….
이 땅에서 단 한 평의 땅을 남기지 않은 장기려 박사님께서는 성남 모란공원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묘비에 비문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답니다. '
"주님을 섬기다 가신 분이 여기 잠들다. ",
묘비 앞에 쓰인 글귀를 보면서 가슴 깊이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이런 생각이 가끔 내안에서 내게 묻는다!
"세상 교회 중 일부 교회엔 " 목사님만 계시고, 예수님은 안 계신다!" 라 고 ....????"
One I Love - Me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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