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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 위로(Consolation) S.172, No. 3

하늘벗삼아 2012. 9. 15. 00:20


 

리스트 / 위로(Consolation) S.172, No. 3

 

티모페이 독쉬체르(트럼펫), 세르게이 소로도브니크(pf)

 


Liszt - Consolation S.172, No. 3
Timofei Dokshitser trumpet
Sergej Solodovnik piano

 

 

 

 

 

티모페이 독쉬체르(Timofei Dokshitser, 1921~2005. 3.16)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유명 악단에서 야성적인 금관의 울림을 자랑해 온 독쉬체르는 하차투리안, 페쉬킨, 바인베르크 등 러시아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하곤 했다. 그들이 독쉬체르를 위해 새로운 협주곡을 작곡했으므로 당연히 초연은 독쉬체르의 몫이었다. 트럼펫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여린 금속성으로 사랑과 동경,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리스트 [ Franz Liszt ] 1811-1886

1823년 파리에 나가 음악원에 들어가려 했으나, 파리 음악원은 이 이국인의 입학을 거절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파리에서 다른

교사에게 배웠다. 그러나 파리 사람들은 이 이국인을 버리지 않았다. 얼마 후 리스트는 파리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으며, 바이올린의 파가니와 함께 마침내 유럽 음악계의 총아가 되었다. 24년 · 25년 · 27년에 그는 영국을 방문, 국왕 조지 4세를 위해 연주 등을 했으며, 약 10년 동안은 파리를 중심으로 생활했다. 이 동안 리스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피아노의 하느님’이라는 칭송까지 듣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다투어 리스트의 연주를 접하려고 연주회에 갔으므로, 각지에서 열리는 리스트의 연주회는 어느 곳이나 초만원의 성황이었다고 한다. 1830년에 리스트는 쇼팽 · 베를리오즈를 만났다. 쇼팽은 리스트에 의해 파리 악단에 소개되었다. 그 작품은 리스트에 의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리스트는 쇼팽 뿐만 아니라 바그너도 세상에 소개했다. 바그너가 만약 리스트를 친구로 두지 못했더라면 아마 베토벤은,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마음이 끌려 빈에서의 소년 리스트의 데뷔에 참석하여 그 연주를 듣고, '이 터키인 꼬마 녀석아, 참 대단한 놈이구나’하면서 입맞추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터키인’은 베토벤의 착각이고, 실제로 리스트는 헝가리인으로,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영토인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다만 어머니는 독일계였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싹트기 시작한 리스트의 천재적 재능에 놀라, 부친에게 권하여 천재 소년에게 음악 교육을 받도록 했다. 최초의 교사는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였고, 이어서 살리에리에게 화성과 작곡을 배웠다. 1822년 12월 1일 리스트는 빈에서 최초의 연주희를 열었는데, 청중은 열광해서 큰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의 예술은 오래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의 위업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그너가 실패를 되풀이 했을 때 그것을 위로하고 격려한 것도 리스트였으며, 그 예술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상연한 것도 리스트였다. 또 리스트는 베를리오즈에게도 여러 모로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리스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연주 여행으로 보냈지만, 1847년에 바이마르의 궁정 악장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리스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교향시라는 형식을 만들어서 「산악 교향곡」(1856년) · 「타소」(1849년) · 「전주곡」(1848년) 등의 12곡을 발표했으며, 「헝가리 랩소디」는 1851년부터 1854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그 밖에 많은 피아노곡 · 협주곡 · 종교곡이 만년에 걸쳐 작곡되었는데, 특히 피아노를 위한 편곡은 수없이 만들어져 그 방면에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

리스트의 활동은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계속되었고, 바이마르는 리스트를 숭배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리스트는 인격자였다. 그의 초상화에서 받는 느낌은 이지적인 나머지 왠지 모르게 차가운 감을 주기는 하지만, 실제의 리스트는 그것과 전혀 다른 면을 지닌 다정한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제자는 물론이고, 많은 숭배자는 리스트를 둘러싸고 항상 가까이 했다. 1836년에 리스트는 다구 백작 부인과 알게 되어 두 사람 사이에는 열렬한 연애 감정이 싹텄고, 그 로맨스에 의해 세 아이를 두었는데, 그 사랑하는 딸 하나가 유명한 코지마이다.

코지마는 그 후 피아노 주자이며 지휘자인 남편 폰 뷜로의 곁을 떠나 애인 바그너에게로 달려가 그 때문에 아버지 리스트를 몹시 괴롭히게 되었지만, 이윽고 그것도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며, 바그너의 위엄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쇼팽의 곡이 여성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리스트는 어디까지나 남성적이다. 타오를 때는 불꽃처럼 타고, 조용해질 때는 얼음처럼 냉정했다. 기교는 날카롭고 그 명암은 깊다. 쇼팽의 몽환적인 시적 분위기에 비해 참으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만년의 리스트는 앗시지의 프란시스에 귀의하여 경건한 신앙을 가졌으며, 그 때문에 네 개의 승려 지위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1886년 여름 바그너가 주관하는 가극 상연에 참석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간 리스트는, 그곳에서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7월 31일에 그 생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