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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년~1992년)

하늘벗삼아 2019. 12. 9. 13:57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

 

 

 

 

 

 

 



 

 

빌리 브란트가 현대 정치사에서 돋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노벨평화상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20세기의 여타 평화사상가나 평화정치가와 달리 성공한정치가이기도 했다. 브란트는 서독 수상이자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오랜 당수로서 동방정책과 민주주의의 진전을 통해 1990년 독일 통일과 유럽의 냉전 해체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장본인이었다.

 

낯선 놈의 이탈

 

20세기 후반의 독일 정치가인 브란트가 국내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은 1970127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추모지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 때문이다. 일본 정치가들의 식민 통치 관련 망언이나 전쟁 범죄의 변호와 비교되면서 나치 과거사 반성에 대한 브란트의 용기 있는 행위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순간의 이면들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 하나를 먼저 들면, 브란트의 그 무릎 꿇기행위는 국제적으로 큰 감동과 호응을 불러일으켰지만 서독 내에서는 평가가 크게 갈렸고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인 반응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1970127, 폴란드 바르샤바 옛 유대인 게토의 저항 투사 추모지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브란트

 

당시 서독 여론 조사에 따르면, 브란트의 행위에 공감하는 사람은 41%였지만 쓸데없는 짓이라거나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48%에 달했다. 특히 서독 수상으로서 소련도, 프랑스도 아닌 작고 볼품없는 나라에서 무릎까지 꿇었으니 이전에 브란트에게 덧씌워진 조국의 배신자라는 이미지가 다시 등장했다.

 

사실 브란트의 인생사와 정치역정은 처음부터 탄탄대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평균적 독일인의 눈에서 보면 브란트는 우리와는 다른 낯선 놈에 불과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먼저, 브란트의 출신 배경이었다. 유럽 사회주의 정치가들 중에는 하층 노동자 계급 출신이 적지 않지만, 브란트는 그것에 더해 출생 배경도 좋지 않았다. 그는 사생아의 사생아였다. 19131218일 독일 북부 뤼벡에서 태어난 그는 헤르베르트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성은 어머니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타 프람이 미혼모였기 때문이다.

 

가게 점원으로 일했던 마르트 프람의 어머니, 즉 헤르베르트 프람의 외할머니도 미혼모였는데 일찍 사망했다. 결국 헤르베르트 프람은 미혼모인 어머니와 의붓 외할아버지에게서 자랐다. 특히 재혼한 뒤에도 자신을 보살폈던 그 의붓 외할아버지를 헤르베르트는 아빠로 불렀다.

 

나중에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브란트는 이 출신 배경과 집안을 엉망진창이라 말하며 숨기지 않았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시민적 도덕과 품위를 중시한 서독 사회 분위기에서 보수 우파들의 조롱거리이자 인신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1937년 유럽 전역을 견문하던 중의 브란트

 

두 번째로 브란트의 정치 경력을 괴롭혔던 것은 그가 독일사민당을 이탈한 소수파 출신이라는 사실이었다. 193017살의 헤르베르트 프람은 애초 사민당에 입당했었다. 하층 노동자였던 어머니와 의붓 외할아버지도 모두 사민당 당원이었다.

 

게다가 헤르베르트 프람은 사민당의 재정 지원으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기에 사민당은 그의 사회적 삶의 모태이자 정치적 고향이었다. 그러나 1931년 사민당이 혁명성을 잃고 나치의 위협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않음을 보고 프람은 사민당을 떠났다. 그 뒤 그는 신생 급진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사회주의노동당(SAPD)’에 가입했다.

 

비록 1944년 사민당으로 다시 복당했지만 이 이탈 경력과 SAPD 당원 이력은 전후 브란트의 정치적 부상에 족쇄가 되었다. 과거의 탈당 경력은 주류 사민당원들에게 종파적내지 비정통적이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국을 배신한반나치 투사

 

마지막으로 정치 망명객으로서의 경력 또한 브란트를 괴롭혔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후부터 종전까지 헤르베르트 프람은 주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독일에 대항해 투쟁했다. 그는 1934년 나치즘에 대항하는 비합법적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름도 빌리 브란트로 바꿨다.

 

그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회주의 운동과 정치가들을 접하고 자신을 발전시켰다. 브란트는 동료들과 함께 좌파 신문을 만들어 파시즘의 위험을 알리고 사회주의의 가치를 옹호했다. 브란트는 노르웨이가 나치의 점령하에 들어가자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1938년 나치로부터 국적을 박탈당한 브란트는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해 2의 조국노르웨이의 해방을 위해 군인으로 복무했다. 물론 그는 그것이 노르웨이를 위한 길일 뿐만 아니라 히틀러 독일과는 다른 독일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1946년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뉘른베르크 재판을 참관했던 브란트의 신분증명서

 

그러나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을 떠나 국적까지 바꾼 경력으로 전후 그는 어려운 시절 조국을 버린 배신자라는 공격에 직면했다. 전후 나치의 전쟁범죄와 파괴적 과거사를 정리할 준비와 의지가 아직은 없던 대다수 독일인들에게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나타난 브란트는 단지 낯설고 의심스런 인물이었을 뿐이었다.

 

특히 보수 언론과 정치가들은 1970년대 초까지도 브란트가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독일에 대항했던 사실을 들먹이며 독일 민족에 대한 소속감과 자긍심이 없는 인물이라고 헐뜯었다. 그들은 그가 나치에 대항했던 투사이며 다른 독일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제 한 몸 살기 위해 위험에 빠진 조국을 배신하고 독일 민족과 국가를 등진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몰아붙였다. 1961년과 1965년 사민당 총리 후보로 나섰을 때 결국 패배한 것도 이런 비이성적 공세가 상당 부분 먹혔던 탓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브란트는 자신의 반나치 투쟁 경력을 내세우기는커녕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브란트는 노르웨이 군복을 입은 기자 신분으로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관해 나치의 범죄를 규탄하는 소책자 범죄자 그리고 다른 독일인들을 발표하기도 했기에 그에 대한 의구심은 지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사민당 내에서 권력을 놓고 그와 경쟁했던 헬무트 슈미트 같은 사민당 정치가들도 의식적으로 브란트와 자신을 구분했는데, 브란트와는 달리 나치 군인으로 참전했던 우리는 독일을 더 잘 이해하며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과 함께 고통을 겪었다고 강조했다. 물론 국외에서 나치에 저항했던 브란트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자유를 옹호하는 사회주의자

 

그런 난관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정치가로서 성공했다. 브란트는 1949년부터 1992년 사망 시까지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몇 년을 제외하고- 31년 동안 서독 연방의회 의원이었고, 1957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서베를린 시장, 1966년부터 1969년까지는 외무부장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연방총리를 역임했다. 아울러 사민당 내에서도 점차 신뢰를 얻었으며 곧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신망을 얻었다. 그는 19642월부터 19873월까지 23년간 사민당의 대표직을 유지하며 당을 이끌었다.

 

 



 

독일의 케네디로 불렸던 브란트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 19636월 베를린에서 케네디를 영접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서독의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

 

브란트가 정치가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독일 사민당 내에서 사회민주주의의 현대화를 가장 앞서 주창하고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인식하고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때 청년 시절 북유럽의 망명 경험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사민주의 정당들의 영향을 받아 교조주의와 계급해방 지향의 구원론을 벗어났다. 브란트는 사민당이 무엇보다 자유의 당임을 강조했으며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이 자유의 가치 보호와 개별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전후 소련식 공산주의의 억압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19482월 체코 공산당이 합법적 선거를 무시한 채 권력을 장악하고 1948/49년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그는 반공주의자임을 자처했다. “오늘날 반공주의자가 아니고서는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물론, 사회주의자 브란트가 생각한 자유란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의 인습적 대변가들이 내세우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브란트의 자유는 시장만능을 옹호하는 자유도 아니었고 평등에 대립하는 자유도 아니었다. 억압적 지배 이데올로기나 비판세력을 박해하는 투쟁 도구로서의 자유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가 이해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인권존중과 법치국가의 원리에 기초해 경제와 사회의 포괄적인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50년대 서독 사민당은 소련식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었지만 아직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노동계급 정당의 성격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서 비로소 사민당은 계급정당의 길을 포기하고 국민정당의 길로 전환했다. 그 전환 과정에 브란트가 큰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민당의 주류가 브란트가 일찍부터 주장한 방향으로 변화한 것은 브란트의 위상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19703월 동독을 공식 방문해 동독 수상 빌리 슈토프의 영접을 받고 있는 브란트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햄릿의 카리스마

 

1960년대 초 브란트는 독일의 케네디로 불리며 대중적 위상과 당내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1958년부터 1963년 사이의 베를린 위기와 동독의 베를린 장벽 건설 때 브란트는 탁월한 연설과 시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인기를 높였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사민당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64년부터 당권을 장악한 브란트가 실제로 사민당을 자신의 구상대로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1970년대 초에도 연방 총리를 역임하면서 얻은 국제적 명성과 국내의 신임과는 별도로 사민당 내에서 그는 상당 기간 고립되거나 오해되었다. 브란트가 사민당뿐만 아니라 현대 유럽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리더십을 보였기 때문이다.

 

브란트가 앞선 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당 대표로 여겨졌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주요 쟁점들에 대해 항상 오랫동안 숙고하고 당원들 및 동료들과 함께 토론했기 때문이다. 흔히 훌륭한 업적을 남긴 정치지도자에게 기대하는 탁월한 판단력과 주도적 결정 및 카리스마 넘치는 추진력 등은 그의 정치 스타일이 아니었다. 브란트는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브란트는 참모나 동료들과 항상 토론했고 당내 회의나 정책 결정 기구들을 존중하며 개방적으로 토론하고 협의했다. 결정은 그 모든 토론 과정의 끝에 내려지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자신도 입장을 가지고 당원들에게로 향했지만 권위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았다. 그는 당원들을 당의 근간으로 존중하면서 토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했으며 그것을 통해 당내의 다양한 계파들의 충돌을 조정하고 갈등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노력했다. 브란트는 1976년 자신의 정치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동독 도시 에어푸르트의 호텔 앞에서 빌리를 연호하는 동독 주민들에게 브란트가 창가에서 답례하고 있다.

 

나는 가능한 한 합의를 통한 업무 스타일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사전에 결정된 내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서 단지 동의를 구하는 식의 토론을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 지도부 회의에서 하나의 합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를 때도 인간적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결정을 미룬 채 끝없이 진행되는 토론 과정은 당내 지도적 정치가들을 힘들게 했고 브란트 자신도 그것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브란트는 책상을 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강력한 권위의 리더십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결국 그의 당대표 시절 사민당은 중요한 결정들을 연기하거나 입장이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사민당의 핵심 정치가들은 불만이 많았다. 브란트와 함께 일했던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그의 결단력 부족과 추진력 결여를 비난했다. 우유부단하며 주저하는 브란트를 두고 그의 핵심 참모 중 한 사람이었던 호르스트 엠케조차 햄릿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또 다른 오랜 동료 페터 글로츠는 브란트를 커브 길만 나타나면 차를 조심스럽게 모는 노인같은 인물로 묘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자신의 원칙과 정치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당내의 의견을 두루 듣고 조정하며 통합해 당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0년대 사민당에는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청년 세대들이 당원으로 많이 가입했다. 그들은 당내 토론 문화의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했기에 당은 위압적 권위나 패권적 카리스마가 아니라 소통과 조정과 통합의 리더십을 갖춘 브란트를 더욱 필요로 했다.

 

게다가 청년들은 부모 세대의 나치 독일에 비판적이었기에 브란트의 반나치 투쟁 경력은 그들에게 사민당에 대한 희망과 기대의 근거가 되었다. 그렇게 햄릿브란트는 새로운 정치 문화의 발전과 당원 구성의 변화로 인해 사민당의 정신적 지주이자 당 통합의 상징적 인물로 도덕적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었다.

 

작은 걸음을 걷는 큰 정치가

 


 

 

19711210일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브란트 <출처: diplomacy.state.gov>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방에 맞서 싸우면서 시작됐다. 1957년에서 1966년까지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브란트는 이미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자유를 옹호한 정치가로 큰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을 때 브란트는 -당시 정적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 연방총리와는 달리- 선거 운동도 접고 서베를린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단호하고 기민하게 대응했다. 브란트는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신뢰와 책임의 정치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런 바탕 위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탄생했다. 1963년 그는 탁월한 참모이자 친구인 에곤 바르와 함께 접근을 통한 변화로 냉전과 분단을 극복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브란트는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동독과 협상을 통해 통행증 협정’1) 이라는 의미 있는 성취를 이뤘다.

 

그는 수년 동안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공산 정권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 지배자들을 비난하고 그들과 대결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통찰했다. 1969년에서 1974년까지 브란트가 총리로 이끈 서독 정부는 소련과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나 동독과 협정을 맺으며 화해와 협력의 기반을 다졌다.

 

특히 1972년 동서독 간 기본조약은 그 후 흔들리지 않고 지속, 심화되었던 양독 간 화해와 협력의 제도적, 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것은 상대 체제와 국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동의 협력사업들, 특히 동서독 주민들의 상호 방문과 인도적 문제의 해결 및 경제와 문화 분야의 교류를 증진시키는 토대이자 동력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인 19891110일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연설하는 브란트

 

이 시기에 브란트는 연설에서 현실적’, ‘실용적’, ‘실제적이란 말을 항상 앞세웠다.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근본적 차이를 넘어서 구체적인 인간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자는 호소였다. 지금 당장 해결 가능한 문제들에 집중하고 그것을 통해 신뢰를 쌓아 변화를 유도하고 더 많은 대화와 협상의 장을 여는 것이 브란트가 추진했던 동방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게 낫고, 특히 거창한 말만 떠들썩하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자신의 평화정치를 요약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독일의 분단 상황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일단 분단으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동독과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 정권과 대결이 아닌 협력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물론 그의 동방정책은 같은 시기 미국이나 다른 서유럽의 평화정책과는 달리 현실의 안정(‘현상유지’)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아울러 추구했다.

 

그런 점에서 브란트는 1989/90년 동유럽 체제 붕괴와 독일통일이라는 거대한 전환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다. 1990103일 독일통일을 축하하는 연단에서 브란트가 가장 큰 환호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 한 평화정치가가 자신이 시작했던 구상과 정책이 완성되는 것을 스스로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도 축복이지만, 그를 믿고 따랐던 정치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에게도 행운이었다.

 

 

 

 

2017년 하반기 개항을 목표로 건설 중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빌리 브란트국제공항 <출처: (cc) Olaf Tausch at Wikimedia.org>

 

브란트가 평화정치가로서 빛을 발한 것은 단순히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대화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할 줄 알았으며 신중함과 진정성을 통해 신뢰를 쌓을 줄도 알았다. 또 그는 필요한 순간에는 작은 행동을 통해 사람들을 매혹했으며 동시에 책임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행위는 의전으로 미리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참모들이 긴급히 속삭여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헌화를 하는 순간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으며 말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이 행하는 바로 그것을 행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그 장소는 유대인의 저항 투쟁과 관련된 곳이지 폴란드인의 희생과는 무관한 곳이었다. 또 서독 정부는 당시 폴란드 정부의 과거사 배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당시 폴란드 언론은 브란트의 무릎 꿇기에 대해 냉담했고 보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성 있는 행위로 인해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서독 총리를 신뢰할 수 있었고 남은 문제들도 계속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브란트는 유럽 평화와 사회주의 연대뿐만 아니라 3세계의 빈곤 문제 해결 등에 대해서도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키며 평화정치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앞장섰다.

 

21세기에 더욱 필요한 20세기 평화정치가

 

브란트는 평화정치가의 위대함이 반드시 탁월한 전망과 원대한 전략 및 단호한 결단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브란트가 전망이나 전략이나 결단력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 또한 브란트의 일부다.

 


 

 

사민당 당수인 지그마어 가브리엘이 빌리 브란트 탄생 백주년을 맞아 그의 동상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브란트의 인물됨은 간단치 않다. 정치가로서는 친화력이 있었지만 인간으로서의 브란트는 약점 투성이의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쉽게 곁을 주지 않았고, 우울증과 술 중독, 여자관계 등의 사생활 문제로 줄곧 동료와 참모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런 인간적 약점과 결단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브란트가 위대한 평화정치가로 기억되는 이유는 현실적 실용주의를 평화정치로 구현할 줄 알았던 정치가로서의 능력, 그리고 신중함과 진정성을 통한 신뢰 같은 덕목을 정치문화로 끌어올린 자질이었다.

 

그는 항상 주저하면서 궁리했고 관찰하면서 토론했다. 그런 뒤에는 진정성을 갖고 말과 글과 몸으로 평화의 현실적 가능성을 넓혔다. 그런 소박한 덕목과 가치를 정치적 삶으로 전환시킨 것이야말로 브란트의 위대함이다. 아울러 그것이야말로 20세기 평화정치가의 상에 진정으로 부응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 자리 잡은 브란트 기념물들을 보면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베를린의 사민당 중앙당사에 있는 3.5미터 높이의 브란트 동상은 이론적 명석함과 투철한 사명감을 지닌 채 앞길을 향도하는 영웅적 지도자 상이 아니다. 라이너 페팅이 만든 브란트 조각상은 대지에 두 발을 딛고어정쩡하게 서 있으며, ‘큰 귀를 가지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주름진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다른 한 손은 모호한 방향으로 펼치고 있다.

 

브란트는 그런 친근하면서도 열린 태도로 대중들과 소통하며 사람들의 현실적 고통을 해결하는 평화를 개척했다. 21세기의 지구는 어디든 그런 평화정치가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있다. 그들이 제발 브란트처럼 성공하기를!

 

빌리 브란트의 명언들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하고 더 많은 공동 책임을 요구하는 사회를 원합니다

- 19691028일 정부 성명

 

굶주림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평화가 지속적일 수 없습니다.”

- 1973926일 유엔 총회 연설

 

평화가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평화가 없으면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 1981113일 연설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게 낫고, 특히 거창한 말만 떠들썩하게 하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게 더 낫습니다.”

- 1987년의 저서 인권 침해와 오용

 

이제 우리는 원래 하나였던 것이 함께 성장하게 될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 베를린 장벽 직후인 19891110일 방송 인터뷰에서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평화마저도 그를 위해 자신의 온 삶과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삶을 들춰보고 의미를 반추하는 일은 미래의 평화를 도모하는 가장 믿을만한 출발점이다.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 평화사를 앞장서 써내려간 노벨평화상수상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논쟁적인 평화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글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현재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바이마르공화국 말기 나치즘 대두에 대한 공산당의 대응>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예나대학교 사학과에서 <Idee einer nationalen Konföderation im geteilten Deutschland 1949-1990>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Bonn)대학교 아시아학부 초빙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 연구교수를 거쳤다. 역사비평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연구 관심과 주제는 냉전사와 평화사 및 과거청산과 역사문화다. 현재 <한겨레21>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Option oder Illusion? Die Idee einer nationalen Konföderation im geteilten Deutschland 1949-1990(선택가능한 길인가 망상인가? 1949-1990년 분단 독일의 국가연합안)(Berlin: Ch. Links Verlag, 2010), 20세기평화텍스트 15(서울: 아카넷, 2013). 역서로는 역사에서 도피한 거인들. 역사는 끝났는가(서울: 박종철출판사, 2001)근대세계체제3(서울: 까치, 2013, 공역)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빌리 브란트 - ‘작은 걸음의 큰 평화 (세계평화인물열전, 이동기,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