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山口) 현 하기시(萩市)는 후쿠오카 하카다역에서 190Km(시모노세키로부터 80Km ) 정도 거리에 있는 인구 5만 명의 작은 도시이다.
동해(일본해)에 접한 이 도시는 막부시대에는 조슈 번(長州 藩, 山口 현)의 번청이 있던 곳이며, '작은 교토'라고 불리울 정도로 전통적인 거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소도시였다.
우리는 이 작은 도시를 찾아 후쿠오카 하카다역에서 새벽부터 신 오사카행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지도와 구글 맵을 검색한 결과, 신 야마구치까지는 신칸센으로, 신 야마구치에서는 역 앞의 버스터미널에서 동 하기행 일반버스를 타고 가기로 일정을 잡았다.
여행자는 역에 내리면 항상 긴장된다. 지도에서는 쉽게 그려지는 길이, 현장에서는 막상 동서남북 방향부터 헷갈린다. 마치 도상훈련(CPX)을 아무리 잘 해도 현장 훈련(FTX)에서 전혀 무용지물인 것과 같다.
물어 물어 하기(萩) 행 일반버스를 탑승하니 요금이 무려 2,060엔이다. 1시간 30분 가는데 2천여 엔(2만 원)이라니, 다시금 일본 교통비가 비싼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기(萩)는 멀고 험했다. 전형적인 일본의 산촌을 구불구불 돌아 넘어야 하는, 우리로 치면 강원도 동해안의 작은 소도시였다. 이런 곳에서 일본 총리가 십여명 배출되고 일본 근대화의 정신이 샘솟다니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동하기(東萩)에 도착해 주변을 조망해본다.
도시 동쪽에 산악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두줄기의 강이 동해로 흘러들어가며, 시가지는 삼각주 평야지대에 항구를 품고 평화롭게 펼쳐진다. 17C 초 모리가문이 도쿠가와막부로부터 박해를 받아 유배된 땅이 이곳 하기성이다.
작지만 평화로운 땅, 산과 바다와 평야를 품고고 산물이 풍요로워 큰 인물을 길러낼 수 있는 자연조건은 그런대로 구비한 곳이었다. 문제는 인물을 키워내는 사회제도와 정신 그리고 교육이었다.
거의 도착한 것 같은데 길이나 안내판이 안 보인다. 도로 옆의 허름한 식품점에 들러 노인에게 물었다. 80세 전후의 노인은 “요시다 쇼인, 쇼카 손주쿠”란 단어에 벌떡 일어서 설명해주고, 부족하다 싶었는지 지도를 그려가며 정말 진지하게 안내해준다.
그가 그려준 지도에는 길과 도로 철길 거리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일본인의 친절과 정학한 기록정신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기록정신은 노벨상 과학자로 부터 서민에게까지 뿌리내려 있었다.
드디어 우리는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 1830-1859)이라는 19세기 중반의 급진적 혁명사상가와, 그의 글방 송하촌숙(쇼카 손쥬쿠, 松下 村塾)과 생가(生家)를 만날 수 있었다.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이란 사상가는 19C 중반부터 21C에 이르는 현재까지 일본 국가 정신을 이끌고 있는 사상체계의 중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발원지는 조슈 번(藩), 하기시 송하촌숙(松下村塾) 이곳이라 말한다.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1830년 조슈 번(藩)(야마구치 현) 이곳 하기(萩)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조슈 번의 영재교육을 받은 촉망 받는 병학 사상가였다. 그는 에도(江戶 도쿄)에서의 교육을 마치고 전국을 순례한다. 이런 촌구석에서 자란 그에게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던 당시에는 대단한 특권이며 경험이었다.
마침 1853년에는 도쿄 만 우라가 항에 입항한 미국 페리 함대의 내항까지 목격하고 일본이 처한 현실과 이상을 정확히 파악한다.
1854년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일본의 서양 식민지화를 우려하며, 나약한 막부와 서양 세력의 척결, 천왕 중심의 국가체제 건설을 주장한다.
나아가 조선을 정벌하고 대만과 만주로 진출하는 길만이 일본의 위기를 타개하는 길이라 설파한다.
감옥과 글방을 전전한 그는 해외 유학을 꿈꾸고 서구와 미국 밀항까지 시도하나 실패한다. 그에게는 현존하는 실권자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존왕양이(尊王攘夷)파라는 불순분자의 낙인이 찍혀있다.
1858년 도쿠가와 막부(幕府)는 천왕의 재가없이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빌미로 반 막부, 존왕양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진다.
막부의 최고 실력자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막부 반대파와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급진파 하급무사 100여 명을 검거하여 무차별 처단한다. 이듬해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도 검거되어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29세에 요절하고 만다. 이것이 유명한 '안세이(安世) 대옥 사건'이다
그 이후 막부 내부의 개혁파는 위축되었지만, 하급무사들을 중심으로 존왕양이파의 막부 반대 움직임은 더욱 격화되었다.
1860년에는 존왕파 타도의 주역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도 에도(도쿄)성 사쿠라다몽(桜田門) 앞에서 보복하는 하급무사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막부파와 근왕파는 1860년대 후반까지, 근대화와 막부 타도라는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소용돌이에 직면한다.
요시다 쇼인은 29세에 요절했지만, 그의 사상은 1857년부터 고향 하기에서 운영한 글방 '송하촌숙(쇼카 손쥬쿠 松下 村塾)'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과 일본제국, 군국주의 일본을 거쳐 부활한다.
진보성향의 송하촌숙 글방은 문하생들의 신분과 지위를 차별하지 않고 선발했다. 기도 다카요시(木戸 孝允), 다카쓰키 신사쿠(高杉 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 와 같은 명문가 출신과 하급무사 출신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카토 아리토모(山縣有朋)와 같은 인물들이 서로 섞여 혁명의 동지가 된다. 여기에 그의 교육은 만민평등사상을 내포하며 혁명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1년여 수학한 요시다 쇼인 스쿨 문하생 중에는, 선각자로 존왕양이를 주창하며 최선봉에서 짧은 생애를 마친 이와, 후발자로 오래 살아남아 제국의 건설에 참여한 자로 갈린다.
메이지 유신 삼걸(三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기도 다카요시 (木戸 孝允 / 1833-1877 별명 가쓰라 고고로 43세)와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산 다카쓰키 신사쿠(29세), 구사카 겐즈이(25세)가 짧은 생애를 마친 사람이다.
단명한 천재들을 먼저 보내고, 최하층 서민 출신의 문하생이 그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완성해 나간다.
이들 대부분이 조슈 번(長州 藩) 송하촌숙(松下 村塾) 출신이다.
초대부터 4차에 걸쳐 일본제국의 총리대신을 역임한 거물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3대부터 2차에 걸쳐 총리대신을 역임한 육군대장 출신 야마카토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쇼인 사상의 상속자가 된다.
이들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기획하고 조선 침략을 실행하며 요시다 쇼인 사상을 실천에 옮긴다.
일본이란 국가는 한(韓) 민족에게는 망국의 한이 서린 증오와 저항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국가 발전 선망의 모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간 일본을 장악한 일본 우익세력, 그 들에게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은 요시다 쇼인의 대륙 진출론(大陸進出論)에서 유래한다. 송하촌숙의 안내 여직원들은 일장기의 백색과 적색으로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오늘도 수많은 일본인이 참배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내셔널 전기 파나소닉의 창업주다. 그가 1979년 일본의 차세대 리더 양성을 위해 사재 70억 엔을 들여 마쓰시다 정경숙(松下 政經塾)을 설립하였다.
요시다 쇼인의 글방을 모방하여 정경인재를 키운다는 것일까?
현대판 송하촌숙(松下 村塾)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야마구치 현 출신 정치인 아베 신죠( 安倍 晋三) 현 총리와 그의 외조부 기시 전 총리도 요시다 쇼인 사상의 신봉자이다.
일본 우익세력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을 경외(敬畏)하면서도 경계(警戒)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본 근대화를 견인한 야마구치현, 촌 동네 하기시,
요시다 쇼인과 송하촌숙(松下 村塾)!!
하기의 젊은 청년들은 무엇을생각하며 동해(일본해)에 낚싯대를 던져 넣는 것인가?
조용한 바닷가, 섬으로 출항하는 배가 승객을 기다리며 기적을 울려덴다.
이제 이방인도 다시 번잡한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