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이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혼인하여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 해로하기가 점차 힘든 세태인가 보다. 요즘 들어 부쩍 '황혼 이혼'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홀로 사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내가 스승으로 모셨던 고매한 한 선생님은 늘그막에 사모님과 같이 살지 않으셨다. 수년을 찾아뵈어도 늘 선생님 혼자 기거하시기에, 어느 하루 조심스럽게 혹 사모님과 사별이라도 하셨느냐고 여쭙자, 그제야 당신 내외의 별거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다.
서로의 생각과 생활방식이 영 맞지 않아 할 수 없이 별거하고 있다면서 매우 겸연쩍게 말씀하셨다. 그 스승님이 돌아가신 뒤 문상을 갔더니 그때는 사모님이 영전을 지키고 계셨다.
그 뒤 내 언저리를 살펴보고, 다른 이의 얘기를 들으니까, 이와 비슷하거나 아예 황혼 이혼으로 혼자 사는 이들이 이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이야기가 이제는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닌 내 이야기, 이웃 이야기로 늘어가는 추세다.
'조신설화'
<삼국유사> '조신설화'를 보면 신라 때 세규사라는 절에 조신이라는 동자스님이 과부가 된 태수의 딸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자 절을 뛰쳐나와 그와 40년 남짓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이들 부부는 늙고 가난하여 식구들을 데리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지냈다.
그런 가운데 15세나 된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으매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또 10살 난 계집아이가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마을의 개에게 물려 아프다고 소리 지르며 앞에 와서 눕자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줄줄이 흘렸다. 그러자 부인이 눈물을 씻으며 갑자기 말했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40년 넘는 동안 정은 깊어졌고, 사랑도 굳게 얽혔으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몸이 쇠약하여 병이 해가 갈수록 깊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심해지니 남의 집 곁방살이나 변변찮은 음식조차도 빌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문전마다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보다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미처 돌봐 주지 못하는데, 어느 틈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풀잎에 이슬이요, 지란(芝蘭) 같은 약속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더 누가 되고, 나는 당신이 있어 더욱 근심이 됩니다. ……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따르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행하고 그치는 것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따르는 것입니다. 청컨대 부디 헤어집시다."
마침내 이들 부부는 각기 아이 둘씩 맡고는 헤어진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요, 또 꿈속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이야기도 현실을 반영치 않은 게 없다.
황혼 이혼은 어제오늘만의 얘기가 아니라 일천 수백년 전 신라시대에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는 '동물의 세계'를 보면, 나이 들고 힘이 빠진 수컷들이 암컷에게 따돌림을 받고 외톨이로 살아가는 모습을 화면을 통해 볼 수 있는데, 사람 또한 동물이니까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게다. 다만 그동안 윤리 도덕이 부부 사이를 쇠사슬로 묶어 이런 일들이 표출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윤리 도덕으로 부부 사이를 묶어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난 듯하다.
황혼이혼의 요인
최근 우리나라에 황혼 이혼이 부쩍 늘어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게다. 민주화의 여파로 여성의 권익이 크게 신장된 점, 여성들의 생활능력 향상, 남성들의 조기 퇴직에서 오는 경제력 상실 등 그밖에도 많은 요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주택구조에도 황혼 이혼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우리나라 전 가구의 절반 이상이 연립주택이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는 좁은 공간인데, 그곳에서 나이든 부부가 24시간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웬만한 부부애나 또는 도를 닦지 않고서는 금실 좋게 지내기가 힘들 것이다.
내 어렸을 때 할머니는 "사내는 그저 아침밥을 한 술 먹고 밖에 나갔다가 해거름 때 돌아와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면서, 사내들은 가능한 집안에서 좁쌀 같은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지난 봄, 한 대학병원 대기실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한 초로의 여성이 속내를 솔직히 늘어놓는 바, 남편이 직장을 나갈 때는 몰랐는데 퇴직한 뒤 집안에 머물면서 세세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자 미칠 것만 같아 이제는 자기가 집밖으로 돌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 여성은 남편 대신 자신이 집밖에서 사회 봉사활동을 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음과 아울러 가정을 굳건히 지켜가고 있었다.
사실 남녀가 연애시절이나 신혼초에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아쉬워서 헤어지자 마자 곧장 전화를 하거나 메일을 보내고, 다시 만나 정열을 불태우곤 한다.
유럽 기행 중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유람선을 탔더니 옆자리의 파란 눈의 젊은이 한 쌍은 언저리 경치 구경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가운데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을 확인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벨기에 브뤼셀 그랑플라스 광장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서로 상대방 허리를 껴안고 언저리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진한 러브신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상륙해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캠퍼스 잔디밭에서도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젊은 날은 남녀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상대의 장점만 보이기에 하루 24시간 같이 있어도 시간이 모자랄 게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어깨도 다리도 힘이 빠지면 보이지 않았던 상대의 단점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고, 거기다가 술이나 담배에 찌든 냄새, 노화에서 오는 역겨운 냄새 등이 폴폴 풍기면, 그동안 아무리 사랑했던 부부 사이일지라도 같이 지내는 시간이 점차 싫어지게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부부는 한 공간에서 지내기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시간으로는 이따금 만나는 게 피차 정신 건강에 매우 좋을 것이며 황혼 이혼을 방지하는 비결일 것이다.
부부 각자 공간의 필요성
며칠 전, 우리 고장에서 전원주택을 지어 분양 겸 사후 관리도 하는 이를 만났더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말인즉, 택지 분양을 계약할 때는 부부가 같이 와 집을 지은 뒤 주말이나 휴가철에 함께 전원생활을 하겠다고 한단다. 하지만 막상 집을 다 지은 뒤에는 부부가 같이 오는 때보다 따로따로 교대로 와 며칠씩 쉬어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부부가 도시 아파트에 살면서 날마다 부딪치는 스트레스를 혼자 별장에 와서 조용히 풀고 간 모양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오늘날의 연립주택이나 아파트 생활이 전통가옥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부부간 더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옛날 우리네 본채와 사랑채가 떨어진 전통가옥이 부부간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구조라는 전문가적인 해석을 했다.
지난날 전통가옥에서는 부부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본채와 사랑채에서 따로 기거를 하고, 손님조차도 따로 만나기에 아무래도 서로의 생활을 엿보거나 간섭하는 일이 적어지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 쓰러져가는 내 집의 본채와 아래채 흙집 구조를 매우 찬미하고 돌아갔다.
내 집을 둘러보고 간 한 친구는 뒤늦은 '산중 밀월생활'을 한다고 부러워했지만 사실 우리 부부는 하루에 두어 차례(주로 밥 먹는 시간)에만 얼굴을 마주할 뿐이다. 각각 본채와 아래채에서 자기 일에 골몰하고 산다. 나는 특히 여기저기 퍼질러놓는 좋지 못한 습성이라 만일 한 공간에서 지낸다면 그때마다 아내는 잔소리를 할 것이고, 그러면 피차 스트레스가 엄청 쌓일 것이다. 누추한 흙집. 내 글방이 나에게는 극락이다.
부부가 늙을수록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치지 않고 사는 게 건강한 부부생활의 비결이 아닐까.
하지만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
시골에서도 전통가옥 구조는 날로 사라지고,
고층아파트가 비 온 뒤 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모든 게 다 그렇지만 주(住) 생활도 편리하게 사는 것만이 좋은 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문명' '개발' '편리'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에 소중한 것을 잃어가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이즈음 스트레스를 몹시 겪고 있는 부부는 과감히 주택구조를 바꾸는 방법도
더 큰 불행(황혼 이혼)을 막는 슬기로움이리라.
우리들 문화엔 문중, 가족, 계원, 회원, 동창등 묶음에 의한 패거리 문화...
그 문화적 특성이 행동 통일과, 강요로 이어지는 일상들...
어쩌면 부부 사이도 강요 받고 있지는 않는 지....
동행이란 등산 할 때 산 길은 함께 걸어가지만, 각자 사색하며 여여함을 느끼는 것 처럼 ....
부부란 공동체 에서도 동양화의 여백의 미가 필요한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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