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복종할 것이다. 한국 국민들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 - LA 타임즈, 1980. 8. 8
존 애덤스 위컴 2세(영어: John Adams Wickham, Jr., 1928년 6월 25일 (88세) ~ )은 퇴역한 미국의 군인으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주한미군사령관 시절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위컴은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수장과 주한미군사령관이 되었으며 박정희 대통령 사후의 위험한 시기를 봉합하고 전두환 정권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1]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에 사전관여하지 않았으나 [2] 이후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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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이 이제까지 한국민들에게 알려진 내용인데 저거때문에 발언자 욕도 많이 먹고 역으로 국개론 소재로도 많이 쓰였죠. 그런데 알고보니 와전된거라네요.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pn=0&num=14476
“당시 미국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전두환ㆍ노태우가 군을 동원해 생긴 안보 공백 때문에 북한의 도발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일 뿐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미국 대사와 미국 정부가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대사와 위컴 사령관은 전두환을 매우 싫어했고 사실은 경멸했다. 위컴 사령관은 12ㆍ12 당시 전두환 등이 전방에서 군대를 빼돌리는 것에 대해 크게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른바 ‘한국인의 들쥐 근성’으로 알려진 위컴 발언의 본뜻은 전두환에 대한 증오심에서 나온 것”이라며 “전두환이 권력을 잡자 곧바로 줄을 서는 한국의 고위직들에 대해 배신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https://namu.wiki/w/%EC%A1%B4%20%EC%9C%84%EC%BB%B4
한국인은 나그네쥐와도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따를 것이다."
- 1980년 8월 8일, 김재규가 사형되고 전두환과 신군부가 다만 대세라는 이유로 쿠데타를 막을 생각도 없이 그냥 지지해서 끝내 대통령 자리에 앉혀버린 한국인들을 보며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서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 광란에 차 대답한 뉴욕 타임스 인터뷰
John Adams Wickham, Jr.
미국의 군인. 한미연합군사령관(1979-1983)[1]과 육군참모총장(1983-1987)을 지냈다.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
1928년 6월 25일에 뉴욕의 돕스페리에서 태어났다. 여러모로 한국과는 인연이 많은 모양 1946년에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진학하여 1950년에 졸업, 임관하였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육군사관학교에서 사회과학 교관을 맡기도 했다.
병과는 보병으로 처음에는 제18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베를린에 주둔한 제6보병연대에서도 근무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위탁교육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고 군내보수교육기관인 국방전쟁학교와 국방참모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제5기병연대 1전투군[2]에서 복무할 때 다시 한국에 왔다.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기도 했다. 베트남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장관급 장교로 진급한 뒤에 주독미군 소속의 제3보병사단 제1여단장을 맡았다.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MACV) 부참모장으로 포로 석방 협상을 맡기도 했고 제101공수사단장과 합동참모본부 수석본부장[3] 등을 거친 뒤에 대장으로 진급하여 1979년에 존 베시에 이어 주한미군 사령관이 되었다.
위컴이 부임한 뒤에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위컴 본인은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신군부가 광주에 군을 투입한 것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나중에 한국 군부에 이를 항의했다. 이런 내용은 영화 화려한 휴가 개봉 전에 영화사를 통해 알려졌다. 위컴은 한국의 민주화가 실패하고 독재자가 나타나자 금세 기세가 꺾인 것을 두고 실망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그러나 위컴이 1996년에 제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했다고 시인하여 두고두고 논란을 가져오고 있다.
전두환이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다음날인 1980년 8월 8일에 <LA 타임즈>의 샘 제임스 기자와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위컴은 전두환이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나그네쥐 (레밍)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만약 전두환이 합법적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해 국민적 지지기반이 있음을 증명하고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정치 자유화보다는 국가안보와 내부안정이 최우선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아는 민주주의를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참고로 저 발언에 나오는 '나그네쥐'란, 정확히는 북미 지역과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에 서식하고 있는 나그네쥐, 즉 '레밍'을 말한다. 즉 위컴은 한국인들이 단순히 쥐새끼 같다고 말한 게 아니라, 앞의 쥐들을 무조건 추종하여 물에 빠지는 레밍의 행태에 빗댄 것이다.
원래 해당 기사는 위컴의 신분을 '고위급 미군장성'이라고만 소개해 익명으로 보도했지만, 그 인터뷰를 보고 빡친 전두환에 의해 '그 장성'이 위컴이라는게 밝혀져서 일이 커졌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 이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이 8월 8일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군 고위관계자'를 위컴이라고 밝혀 익명성을 제거한 것 때문이었다. 서울발 기사는 미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이 기사가 한국 언론에 다시 보도되면서 기사 내용이 검열/왜곡되어 미국 정부가 전두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둔갑해 물의를 더하면서 전두환은 환호했다. 이에 위컴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 전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워싱턴과 서울에서 일고 있는 파장에 가장 당황했다.[4]
이에 미 국무부는 위컴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이는 미국 정부의 뜻이기도 하다. 위컴의 해당 발언에 대해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존 앤더슨은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위컴의 발언을 시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카터 역시 "한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라도 (중략)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해 미국이 전두환을 사실상 지지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어쨌건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언 당시에는 전두환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땡전뉴스들의 고의적인 폄하조작에 따라 분노하였지만 결국 나중에 시간이 지나자 "입장이 180도 뒤바뀌어 위컴의 발언이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핵심을 찌르는, 탄복을 자아내는 발언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80년대판 몽주니어 [5] 즉, 위컴은 전두환이 어떤 짓을 하던 간에 대세라는 이유로 전두환과 그를 추종하는 민정당에게 투표하는 한국인들의 행위를 보며 절망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위컴의 발언이 있기 전인 8월 6일 아침 서울 롯데호텔에서 한경직, 정진경, 조향록, 강신명 목사 등 개신교계 원로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도회가 열려 '전두환 사령관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기도문에서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게 상각한다."고 기도를 올렸다.
1983년에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으며, 1987년에 퇴역했다.
이유는 불명이나, 정복에 명찰을 절대 안 달고 다녔다고 한다. 위의 프로필 사진만 해도 약장을 명찰 자리에 달고 있다. 원래 미 육군과 공군은 부대 단위로 받는 약장들을 저 위치에 따로 단다. 명찰은 부대 표창 밑의 주머니 덮개에 단다.
[1]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는 8대였고 한미연합사 사령관으로는 2대였다.
[2] 영어로 battle group이며 5개 중대로 구성된다.
[3] Director of the Joint Staff. 합동참모본부의 주요 본부장들(주로 2,3성 장군 및 제독들이 각 부처의 본부장으로 있다. 간혹 준장급 장성들도 1자리씩 본부장으로 있는듯 하다. 부본부장은 대개 국방부 민간 고위관료들이 보직하여 교차임무를 수행한다.)을 통솔하는 3성급 보직으로, 미군에서 이 보직에 오른다는 것은 사실상 대장 진급이 99% 확실하다는 뜻이다. 위컴 이후 주요 인물로는 노턴 슈워츠, 월터 샤프, 스탠리 매크리스털, 로이드 오스틴, 커티스 스캐퍼로티 등이 있는데, 위컴 이후로 이 보직을 거친 이들은 전원이 대장으로 진급했다.
[4] <알려지지 않은 역사(윌리엄 글라이스틴 저.)>. 중앙M&B. 1999. p228.
[5] 출처: <한국 엘리트들은 왜 교도소 담장 위를 걷나?> 조성관,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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