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를 선도한 약산 김원봉의 무장투쟁
독립운동 나선 청년들 약산 아래 모여…“임시정부는 너무 연로, 방책도 없어”
아시아경제 | 백우진 | 입력2015.08.10. 14:31
[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중일전에 참전하기 위해 중국 광둥에서 난징으로 갔다. 먼저 김구(1876~1949)가 영도하는 임시정부측에 갔으나 사람들이 너무 연로하고 청년들을 전투에 참전시킬 방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여러 청년들과 함께 약산 쪽으로 갔다."
이는 훗날 인민군 부참모장을 지낸 이상조(1915~1996)의 회고다.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이상조는 약산의 인도에 따라 1937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했다. 중앙육군군관학교는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으로 1924년에 개교한 황포군관학교의 후신이다.
당시 약산 김원봉(1898~1958)에게 모여든 조선 청년은 백수십 명이었다. 독립투사ㆍ작가 김학철(1916~2001)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김학철은 "숭배하는 마음을 갖고" 약산을 만났다고 훗날 들려줬다.
↑ 백범 김구(왼쪽)와 약산 김원봉
의열단과 의열단의 민족혁명당(민혁당)이 근거지로 삼은 이연선림(怡然禪林)이라는 절의 후원에서 약산은 이들 청년에게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은 무장투쟁"이라며 "전쟁과학을 모르면 발톱까지 무장한 강대한 적과 맞설 수 없다"고 말했다.
김학철은 자전적 소설 '격정시대'에서 약산이 연설을 마치자 학생들이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는"약산의 연설은 원고를 읽어내려간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간단명료했다"고 말했다.
이들 조선 청년 100여명은 중앙육군군관학교의 장시성 교정에서 처음엔 중국인 학생들과 섞여 훈련을 받다가 나중엔 독립 중대로 편성됐다. 조선 중대의 교관은 대부분 민혁당 당원이었다.
조선인의 당시 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는 중국의 2차 국공합작으로 한일민족통일전선이 설립됨에 따라 장개석의 국민당측이 결정해 가능해졌다. 백범 김구도 입교를 지원하는 조선인을 모집했지만 청년들은 대부분 약산 아래 모였다가 그의 인솔에 따라 입교했다.
조선의 열혈 청년들이 백범보다 약산을 따른 것은 두 지도자의 이력을 살펴볼 때 당연한 선택이었다.
약산은 의열단을 조직해 저격ㆍ파괴공작을 벌이다 무장전투 조직 양성으로 노선을 수정했다. 약산 자신이 1926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했다. 또 약산은 중국 국민당에서 지원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1932년부터 1935년까지 3기에 걸쳐 각각 군사 간부 40여명을 양성한 바 있다. 시인 이육사(1904~1944)가 바로 이 조선혁명간부학교를 1기로 졸업하고 국내에 침투했다가 체포됐다.
백범은 이봉창ㆍ윤봉길 의거를 지휘했으나 이는 "민족운동이 매우 침체하여 군사공작이 어려우면 테러공작이라도 해야 할 때"라고 판단해 임시정부 국무회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택한 전술이었다. 또 두 거사는 김구가 시작했다기보다 두 의사가 스스로 김구를 찾아와 제안하고 의욕을 보여서 추진됐다.
윤봉길 의거가 국제사회와 중국에 큰 반향을 일으키자 김구는 면담을 요청해 장개석을 만났다. 김구는 "자금을 지원해주면 일본ㆍ조선ㆍ만주에서 큰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국민당측은 되레 병력 양성을 권유했다. 양측은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한 기에 군관 100명을 키워내기로 했다. 이청천과 이범석이 이곳에서 각각 교관과 영관으로 군관을 훈련시켰다. 김구는 "동북 3성의 옛 독립군들과 중국 관내 지역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며 "1933년 11월 92명이 입학했다"고 주장했다.
백범의 이 주장에는 해설이 필요하다. 김구는 이듬해인 1934년 4월 초 약산의 혁명간부학교를 찾아와 2기생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김구의 실제 방문 목적은 혁명간부학교 학생들을 낙양분교로 유치하는 것이었다. 약산은 김구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지만 대국적인 차원에서 이를 받아들여 2기생 가운데 우수한 20여명을 선발해 김구가 방문한 직후인 4월 10일경 낙양으로 보냈다.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낙양분교 입학생 92명에는 약산이 보내준20여명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백범을 임시정부와 동일시하지는 못하지만,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고 대외적으로 열강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자신들이 '임시정부'로 인정받을지에 힘을 쏟고 내부적으로는 감투를 차지하기 위한 세력다툼을 벌이면서 세월을 보냈다.
임시정부의 안창호(1878~1938)는 1920년 5월 약산에게 "폭탄을 단독적으로 기율없이 사용하지 말고 임정 군사당국에 예속돼 실력을 점축한 뒤 상당한 때에 대거(大擧)할 것"을 요구했다.
의열단원으로 1921년 9월 조선총독부를 부분 파괴한 김익상이 1922년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향해 권총을 쏜 사건에 대해 임시정부는 자신들이 결코 개입하지 않았음을 적극적으로 해명했다가 많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자료)
염인호, 김원봉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3
김구 지음ㆍ도진순 엮어 옮김, 쉽게 읽는 백범일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