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범죄>의 저자 신기철 |
그는 1980년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공부를 잘했고 마음도 착했으니 그냥 조용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착실히 다녔으면 지금 그는 물질적으로는 무척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길을 걷지 않았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찾아간 곳은 번듯한 대기업이 아니라 1980년대 당시 열악한 인천, 구로, 영등포지역의 공장들이었다. 여러 공장들을 전전하며 그는 노동운동에 몸을 던졌고 그 후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내가 신기철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였다. 내가 기억하는 신기철의 첫 인상은 참 초라했다. 옷차림과 외모가 검소와 수수 그 자체,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순수와 소탈 그 자체였다. 그는 달변가도 아니고 성격이 원만한 편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금이라도 더 그를 알아갈수록 '초라한' 겉모습 뒤에 가려져있는 '위대한 정신'과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신기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지난 2010년 말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명박정권에 의해서 '폐업처리'되었다. 정부차원의 과거사정리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로 나온 40대 중반의 부인과 딸 셋을 둔 '무직' 가장 신기철의 과거사정리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조용한 행동가다. 진실화해위원회를 나온 뒤 그는 들판에서 벌써 3권의 책을 썼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 이어 최근 이승만정권이 한국전쟁기 저지른 민간인학살 사건 <전쟁범죄>를 발간했다. 역사학 전공자인 기자가 그의 앞에서 숙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이유다.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신기철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는 '전쟁범죄'"
▲ <전쟁범죄> 책 표지. | |
ⓒ 인권평화연구소 |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군경에 의한 대량학살이었다. 서구학자들은 이를 메서커(massacre)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개별사건들에게는 적당해 보이지만 한국전쟁처럼 100만 명의 다양한 희생자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이 부족한 개념 같다.
민간인에 대해 한국전쟁의 경우 전투에 방해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잠정적인 적으로 여겼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쟁 전 빨치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쟁 후에는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이라거나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사건이나 부역혐의사건이 저질러졌다. 민간인조차 아군 편과 적군 편으로 가르면서 벌어진 집단살해행위라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전쟁 전후시기 이승만정권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포괄적인 전쟁범죄로 보는 데 이견은 없어 보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반인륜범죄'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논란이 있을 것 같다. 생명권의 측면에서는 사소한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좁은 의미에서 전쟁범죄는 점령지 민간인살해를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국민에게 저지른 고문이나 학살행위를 '반인륜범죄'라고 하며, 점령지 적국민에게 저지른 집단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본다는 해석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승만의 자국민 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자국민을 독가스로 집단학살한 이라크 후세인은 '반인륜범죄'로서 사형 당했다. 독재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자국민을 학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범죄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량학살이 벌어진 사실만으로도 '반인륜범죄'를 구성한다. 하지만 나는 전쟁 당시 이승만정권이 희생자들을 자국민이라기보다 적의 국민으로 보았던 것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로 보아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에는 '전쟁범죄'라는 정의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한 가지 비교해 보고 싶은 사례는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민간인 학살행위, 곧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이다. 국군 수복 직후부터 조사되었던 이 사례는 KWC(Korean War Crimes, 한국전쟁범죄)라는 문서로 보고되었다. 점령군인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학살 행위였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구10월항쟁이나 제주4․3사건, 여순14연대사건, 그리고 이에 이어 10만여 명을 학살했던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전쟁범죄에서 봐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15해방 직후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스스로를 '해방자'가 아닌 '점령자'로 표현하였으며, 이를 계승한 이승만정권의 입장 역시 같았던 것은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승만정권이 '국민과의 전쟁'을 시작하여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평가하는 이유와 근거는?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협상 결렬을 계기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해방 후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일본식민지를 해방시켰다기보다는 점령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친일세력을 이용하면서 일반 국민들과는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대구 10월항쟁이나 호남지역의 추수봉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집단학살사건을 저질렀지만 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미군정을 승계한 이승만정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직후부터 한국전쟁발발 직전까지 민간인학살 방식을 일반화시켰다. 예를 들어 제주 4․3사건을 생각해 보면, 토벌작전과 함께 민간인 3만 명이 희생되는 시기는 사건 직후인 1948년 4월이 아니라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였다. 여순사건과도 맞물려 있지만 이 시기는 이승만 단독정부의 수립 직후였다.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같은 시기에 시작되어 1950년 초까지 진행된다. 이는 잘 주목받지 않고 있는 측면이다. 같은 시기 민간인 인명피해는 10만 명이 넘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전국 각 지역 형무소에 수용되었거나 국민보도연맹원이 되었고 이들은 전쟁 발발 직후 모두 학살당하게 된다.
나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정권이 남북화해정책보다 적대정책을 택했으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두 적을 돕는 세력, 또는 적으로 보았다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이승만정권은 반정부 세력 탄압의 관점이 아니라 적을 제거한다는 관점에서 증오심에 가득 차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본다.
그리고 '국민과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물리력의 정비, 곧 국군의 정비다. 전방 4개 사단을 제외한 후방 4개 사단과 지역 경찰력이 후방 토벌을 빌미로 민간인학살에 동원되었고 결국 1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이는 국민을 적대시한 정책의 결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제노사이드(인종 학살) 연구자들은 집단학살 발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물리력의 준비를 들고 있다. 학살 주체와 무기가 준비되어야 제노사이드가 일어난다는 것인데, 국민이 제어하지 못하는 군대가 준비된다는 것은 이미 국민에 대한 국가범죄가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본다."
"국군의 민간인학살이 인민군 학살행위로 왜곡돼"
▲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
ⓒ 신기철 |
-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진실화해위원회 이영조 상임위원(나중에 위원장)은 '미군전범조사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저자(당시 조사관)에게 '악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미군보고서의 어떤 점이 왜곡된 것을 지적했나?
"양평에서는 1950년 9월 28일 후퇴하던 인민군 측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학살이 있었다. 내가 직접 인터뷰한 양평경찰서 사찰계 형사는 당시 희생자 수가 150명 정도였다고 했고, 반면 수복 당시 현장을 목격한 미군 장교는 700명이라고 보고했다.
나는 양평지역 사건을 조사하면서 미군전범조사보고서(KWC#33) 내 사진자료를 보게 되었다. 여기에는 1950년 9월 말 후퇴하는 인민군 측이 학살했다는 증거로 쓰인 사진들이 있었다. 이중 2장의 사진을 보자.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
ⓒ 신기철 |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여기서 일단 눈에 띄는 점은 사망한 지 4~5개월 되었다는 미 조사관의 법의학적 소견이었다. 1951년 3월 발견했으니까 4~5개월 전이면 1950년 10~11월이 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 사진은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을 촬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자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는 증언과 정황을 주목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의 백골화된 시신은 발견 당시까지 노골적으로 방치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시신이 방치되는 경우는 대부분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한국 민간인이 국군에 의해 부역혐의로 총살당한 경우이며,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의 시신이 방치된 경우는 확인된 바가 없다.
희생지역도 문제가 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지역과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사건 피해지역이 1km 정도 차이가 나는데, 위 시신을 발견한 지역은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지역이 아니라 국군 측에 의한 부역혐의 피해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이 사진의 시신들은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가 아니라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중순경 이후 희생자로 판단된 것이다. 결국 미군 측의 사진자료는 해당 사건과 상관없는 것으로 나는 진실위 근무당시 오히려 국군 수복 후 벌어진 부역혐의사건의 일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의혹 제기 수준에서 서술하라고 결정했다."
- 그러면 당시 미군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저자)에게 왜 이영조 상임위원은 '악의적'이라고 지적했다고 생각하나?
"진실화해위원회는 3개의 조사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사1국은 항일독립운동과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2국은 (한국)군경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3국은 인권침해사건을 조사했다. 당시 조사1국의 조사를 총괄 지휘했던 분이 이영조 상임위원이었다.
그런데 조사1국의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의 상당부분은 이미 사건 직후에 미군과 경찰이 조사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조사보고서인 KWC조사자료가 가장 결정적인 입증자료였다. 그러니 나의 지적이 이영조 상임위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KWC 조사자료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 것으로 여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여간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면 한 자료에서도 많은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방부에서 조사한 증언록 역시 진실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고 있다. 자료를 올바로 해석하자는 게 과연 '악의적'인지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하리라 믿는다."
"김구 선생 지지했던 군인들,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해"
▲ 마산형무소에서 이승만정권에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 | |
ⓒ 신기철 |
- 한국전쟁기 형무소에 이미 갇혀있던 주요 반정부인사의 학살사례를 소개하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토대로 19개 형무소 희생자 수를 추정해 보면 적어도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두 전쟁 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거나 재판과정에 있던 분들이다. 학살된 분들 중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했던 분들도 많아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아마 근현대사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집단학살사건에 있어서 반정부인사의 죽음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동안 알려져 있던 것에서 벗어나 있는 사례들이 있다. 형무소에서 희생되신 분들을 구분지어 본다면 제주4·3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과 여순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이 가장 큰 규모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 숙청 군인들도 한 그룹이 될 수 있다.
마산형무소에서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1913년생)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 전 숙청당한 군인들 수는 장교 242명을 포함하여 4400여 명이 된다. 김구 계열인 전 소령은 1949년 2월 여순사건과 관련 있다며 연행되는데, 같은 해 6월 김구 선생의 암살 후 징역 6년형을 선고받는다. 전 소령은 같은 해 5월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강제 퇴역당해 민간인 신분으로 마산형무소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그런데 마산형무소에는 같은 이유로 수용당한 군인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숙청당한 군인들은 1950년 7월 초 마산과 거제 사이 괭이바다라는 곳에서 동료 해군 헌병대들에 의해 학살당한다. 결국 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군인들이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한 것이다.
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 8천 명이었으니 숙청당한 군의 규모가 무척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승화 장군 등의 수기를 보면 당시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들이 숙청당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한국전쟁 초기 왜 국군이 그렇게 일찍 붕괴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전호극 소령이라고 생각한다."
- 인민군 후퇴시기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진실이 왜곡된 사례가 있었는가?
"경찰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영광 오길종 일가족 3명이 좌익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된 경우는 진실이 완전히 왜곡된 사례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명확히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진실위에서 조사한 민간인학살사건 대부분의 경우는 기본적인 진실조차 규명되지 않았다. 여러 제약으로 정부 측 기록에서 확인되는 의문점을 지적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군 후퇴시기의 학살명령이다. 인민군 측에 의한 학살 중 84.6%가 1950년 9월 26~30일 사이에 벌어졌으니 조직적인 명령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조차도 당시 순차적으로 수복되는 전황을 보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수복 후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많다.
하여튼 약간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나 진보 학자집단 모두 인민군의 학살명령이 있었다는데 견해가 일치된다. 하지만 나는 양쪽 다 주장의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국방부나 검찰은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그 근거로 체포된 군산(당시 옥구군) 미면 신관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을 들고 있다. 문서 한 장 남은 것이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시기 전국의 희생사건을 일개 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게다가 군산에서 사건이 발생하던 1950년 9월 28일 서울 영등포에서 체포된 이 인민위원장은 재판 출석자 명단에서는 다른 10여 명과 함께 사라진다. 나는 이미 부역혐의로 학살당한 뒤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추정한다. 갖은 고문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재판도 받기 전에 처형이 이루어진 시대의 자백, 그 조차 입증자료도 없고. 이걸 믿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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