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神을 건강하게/삶의 역사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은 평양 을밀대 지붕

하늘벗삼아 2014. 4. 1. 14:33





1931년 5월 말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은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랐다. 공장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 통보에 맞서 싸우기 위한 농성이었다.
한국노동운동사의 첫 고공농성. 강주룡은 한국 여성노동운동가 1호로도 기록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무산자의 단결과 고주(고용주)의 무리를 타매하는 연설을 하였다"고 시위를 전한다.

 

1931년 〈동강〉 7월호는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라는 연설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을밀대에서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이라고 했다. 8시간 만에 경찰에 붙잡힌 강주룡은 옥중 단식투쟁을 이어가며 임금 삭감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자신은 해고를 당해야 했다.




 


↑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강주룡은 <체공녀>로 불렸다. |경향신문 자료

고공농성은 진압과 체포를 피하면서 노동자의 주의·주장을 선전하는 투쟁 방법이다. 전술적 측면이 강하지만, 고공농성 현장은 노동자들에겐 '백척간두'의 현장이기도 하다. 진일보하건 나락으로 떨어지건 때로 생사를 걸어야 하는 극한투쟁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이 강화되면서 고공투쟁이 다시 등장했다. 1990년 4월 25일 현대중공업의 총파업은 '골리앗' 총파업으로 불린다.

노조는 임·단협 성실교섭 요구와 노동운동 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82m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에 올랐다. 노조는 87년 7월 노조 결성 이후 크고 작은 투쟁을 이어갔다. 공권력은 강경·무력 진압으로 일관했다. 90년 4월에도 1만2000여명의 공권력에 맞서기 위해 결사조 78명이 골리앗에 올라갔다. 이들은 단식투쟁을 하다 농성 13일 만에 골리앗에서 내려와 전원 연행됐다.

그해 7월 4일에는 대구 남선물산 노조 집행부 3명이 회사 내 15m 굴뚝에 올랐다. 임금협상 타결과 구속자 석방·복직을 요구했다.

대우조선 노동자 50명은 이듬해인 91년 2월 7일 파업 돌입 선언식 뒤 투쟁결사대를 구성해 104m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했다. 당시 노동자의 고공농성은 구속으로 이어졌다. 이들 투쟁에 관한 공권력과 재판부의 부정적 인식은 견고했다. 91년 11월 대우조선 파업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은 "최근 근로자들의 임금수준이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올랐고, 노사관계가 성숙단계에 이르렀는데도 피고인들이 생산현장의 중요 시설인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농성하는 등 불법파업을 저지른 것은 용서할 수 없다"였다.

정권 교체 뒤에도 고공농성은 이어졌다.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대치가 높아진 측면도 있지만, 신자유주의 도래와 맞물려 자본·권력의 노동 억압이 강화되자 반작용으로 극한투쟁을 벌일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