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난 작은 혹을 째러 피부과에 들렀다. 볼이 퉁퉁한 여의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수술을 하면 자국이 많이 남으니 레이저로 하겠다면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 돈이 안 되는 간단한 칼질보다 편하게 돈을 버는 최신식 기계에 앉아야만 치료가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는 ‘되도록 성형외과로 가세요’ 라며 쌀쌀맞게 말했다. 한파가 몰아치는 그날은 우연히도 1월 14일이었다. ‘그래도 칼로 수술해주세요’ 라고 말하면 그 얄미운 여의사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남에게 뭘 그리 베푸는가’ 싶어 생각을 포기했다. 그날은 1월 14일이었다. 라디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 가 30만명의 관객을 기록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날은 울지마 톤즈(이태석 신부가 의료 및 교육 봉사를 한 수단의 지역)의 주인공인 이태석 신부가 1년 전 선종한 날이었다. ‘나는 남에게 뭘 그리 베푸는가’ 또 생각했다. 그래서 베풂을 위한 나만의 작은 계획을 세우곤 ‘화제의 인물’ 로 그를 소개한다. 내가 받은 베풂의 작은 씨앗을 누군가 또 마을 한 구석에 심을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 그의 유언 ‘everything is good' 그는 선종했다. 48세의 나이, 대장암이었다. 2010년 1월 14일이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병간호를 하던 누나와 동료 신부에게 안심하라는 손짓을 하면서 “everything is good" 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의 태어남과 죽음 중에 우리는 그의 죽음을 더 선명히 기억한다. 아프리카 수단의 슈바이처가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과 또 그런 이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너무나 많은 새 생명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를 후원하던 인터넷 카페 ‘수단어린이장학회(cafe.daum.net/WithLeeTaeSuk)' 회원 수는 3,000명에서 1만 3,000여명으로 늘었다. 후원자도 800명에서 4,000여명으로 증가했다. 그를 이을 의료진도 수단에 곧 파견될 것으로 보인다. 톤즈의 돈보스코 고등학교 건물 네 동이 완공됐고 오는 5월에는 한국인 의사가 톤즈에서 진료를 시작할 예정이다. 그를 조명한 영화도, 그가 쓴 책도 이태석 신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가 톤즈에서 배웠다는 하늘나라 수학을 증명한 셈이다. 이 신부는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면 우리가 가진 것이 십분의 일로 줄어드는 속세의 수학과는 달리,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었기에 그것이 1,000이나 10,000으로 부푼다는 하늘나라의 참된 수학, 끊임없는 나눔만의 행복이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행복 정석을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고 했다. 물론 톤즈는 아직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가 말한 것처럼 톤즈에서는 100원이면 한 끼를, 1,000원이면 항생제로 한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한번에 700만~800만원이 들어가는 우물도 만들어야 한다. #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지은 이유 이 신부는 1962년 부산 서구 남부민동에서 태어나 26세에 인제대 의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다시 사제의 길을 걸었고, 8년간 수단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그는 의사였고, 선생님이었다. 수단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 그는 “그곳이 가장 가난한 곳이었다.” 고 짤막하게 답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겠다는 그의 의지는 1960~70년대 부산에 보육시설을 세우고 평생 가난한 한국아이들을 위해 봉사한 소 알로이시오 신부에게서 영향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 신부는 한국에 베푼 헌신으로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선행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단에 도착해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지었다. 그 해답은 이태석 신부가 세상에 남긴 한 권의 책 「친구가 되어주실래요?」에 담겨 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도 같은 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이 넘치는 학교, 그런 학교를 말이다.” 톤즈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 신부의 진심은 아주 작은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우선 마을 사람들에게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 발에 상처가 났는데 주민들이 맨발로 다니면서 상처가 곪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 약을 줄 때도 일일이 사용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지금도 이신부의 사진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이 박수를 칠 정도다. 톤즈에서는 40대, 50대 중년이나 70대 노인도 이 신부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톤즈에서 백신 냉장고와 아이들의 기숙사에 전등을 가동하기 위해 태양열 전기도 설치했다. 봉사를 넘어서 함께 살러 간 것이었다. # 씨앗이 나무가 되다. 1월 8일 경기 과천시민회관에서는 이 신분의 1주기를 기념하는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900석의 공연장에 1,100여명이 몰려 통로에까지 관객들이 앉았다. 이 신부가 생전에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 자리엔 톤즈 출신으로 한국에서 유학 중인 존 마옌(24)과 토마스 타반(24), 산티노(26)가 함께 했다. 그들은 아버지로 여겼던 ‘쫄리’ (세례명 요한의 영어식발음과 성을 합해 쉽게 부른 애칭) 신부에게 배운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다. 이 신부의 뜻을 잇기 위해 마옌과 타반은 한국어를 익힌 뒤 의대에 진학할 예정이고 산티노는 농업기술 쪽을 공부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톤즈에 뿌려진 씨앗만큼이나 한국에도 그의 씨앗이 퍼지기를 바라면서 필자의 사족을 붙이지 않은 그의 순수한 구절 몇 개를 소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