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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2

하늘벗삼아 2020. 1. 6. 19:12

2. 요시다 시게루(Yoshida Shigeru)와 한반도 재진입

 

 

 

1948년 사회당의 카타야마 내각이 와해되고, 카타야마와의 연립정부를 깬 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芦田 均, 1948년 3월~1948년 10월)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자중지란은 계속되었고,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자유당(Liberal Party)의 요시다 시게루(Yoshida Shigeru)가 민주당 의원 모임인 민주클럽 소속 의원들과 함께  민주자유당(Democratic Liberal Party)를 창당하고, 요시다 내각이 출범했다(1948년 10월~ 1954년 12월까지 수상 재임).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요시다 시게루





탄광국 뇌물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다나카는 1949년 중의원 선거에 옥중출마해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고, 나가오카(Nagaoka Railway) 철도 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일본 법원은 '뇌물이 아니라 정치헌금'이라는 논리로 다나카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법무부 차관을 지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6.25전쟁)에 요시다는 미군을 위해 자위대를 파견하며 참전한다. 평화헌법을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위반한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 나치를 키워서 독일 정권까지 장악하게 지원하고, 미국에서도 히틀러 나치식의 파시스트 독재정권을 세우려 쿠테타 모의까지 했었던 미국표 나치세력과 이들이 떠들어 대는 '냉전', '반공'이라는 말장난에 경도된 '선의'를 가진 미국인들에게는 미국의 군사위성국으로 전락한 일본의 구일본군과 일본의 전범세력은 반성하고 청산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버리기 아까운 유용한 자산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한창 중이었던 1952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1954년 <자위대법>에 의해 자위대 창설된 후, 유엔회원국이 되었다(1956년). 정작 피해자였던 남한은 피해보상은 커녕 최소한의 사과도 받지 못한 것도 모자라, 주권을 잃어버린 죄로 1991년이 되어서야 북한과 동시가입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유엔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1991년 9월 17일)





(1) 1950년 한국전쟁과 일본 참전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협정

 

 

 

일본에 요시다 시게루 정부가 두번째로 출범한 후 한반도에서 1950년 한국전쟁(6.25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도쿄에 있는 미극동군사령부가 지휘하고,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의 승인을 얻어 구일본군인들은 - 2차 대전 당시의 연합국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GHQ)  후신인 -  '미극동군사령부' 조직하의 정보부 '전사편찬실'에 근무하고, 혹은 한반도 전투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이 같이 손잡고 1947년 제정된 일본의 평화헌법을 송두리채 폐기처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므로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남북전쟁에 구일본군을 참전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냥 전쟁만 이기면 그만일 뿐. 혹은 한국전쟁은 미국표 나치가 전후 새로이 깔기 원했던 '냉전시대'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므로 "북한과 남한이 '좌.우' 이념으로 나뉘어 전쟁을 했다" 이 자체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 외 나머지는 무시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반도에서의 한국전쟁은 미국이 야기한 것이라는 주장이 꽤 설득력있게 들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현재까지 모은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의 한국전쟁은 미국표 나치의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통해 소위 '냉전'시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자유주의','민주주의' vs '공산주의', '전체주의' 라는 해괴한 논리가 자리잡게 된다.  이 반공 논리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뭐든지 다 '선'이다라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표 나치의 작품인 이 반공논리에 따르면 '공산주의'에 반대하기만 하면 아무리 악질 독재자라도, 의회를 없애고, 법관들은 대통령이 다 임명하고, 체육관에서 선거를 해도, 헌법 위에 군림하는 정보부가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잡아가서 빨갱이라고 고문하고 괴롭히고 죽이고해도 여전히 '악'인 북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선'이라는 논리를 강요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해주었다. 이런 냉전식 반공 사고의 전형이 '경제지상주의'이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이명박표 남한을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라는 왕관을 씌워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제팀에 의해서 강제로 이식되었던 남한의 삼성왕국의 만행은 이렇게 해서 그 합리화 논리를 마련하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일 매국노들이 '반공'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해방된 남한에서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지식인들을 비롯한 선량한 시민들을 '빨갱이'라고 잡아가서 고문하고, 죽이고, 탄압하는 요지경 세상을 만드는 데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왜곡된 '반공' 이념이 초래한 사회병폐는 비단 남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친일 매국이나 하며 자신의 돈벌이와 출세에만 혈안이 됐던 이들이 해방된 조국의 동족이 '사람'으로 보일리 없었을 것이다. 돈에 눈 돌아간 종놈 돌쇠에게 완장 하나 채워줬더니 온 동네 다 들쑤시고 다니며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꼴이라고나 할까.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기 원했던 일본 수구세력이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실지로 이런 비밀협정을 맺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MBC> 한국전쟁의 흑막과 일본 참전의 비밀 





하지만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맺어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전범국 일본이 주빈으로 초대되었음에도 남한은 옵서버 자격에 불과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어느 나라 보다도 치열한 대일 항전을 이어나갔고, 임시정부까지 갖추고 조직적인 저항을 계속했음에도 남한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 당사자가 되지 못했고, 온전한 주권 국가로 인정 받지 못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이 이렇게 완전히 뒤집어진 것은 1951년 4월 23일 미국의 대일강화 전권대사였던 델레스(John Foster Dulles)와 요시다가 만난 후였다. 미국의 존 델레스 특사와 "경찰준비군" 창설을 밀약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한국의 조인국 참여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사히 신문이 2000년 8월 22일자 기사로 공개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주빈으로 초대받지 못하고,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고 발언권 조차 없었던 남한 대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강요된 화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그리고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일본은 노골적으로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1953년 일본은 일본정부 허락없이는 독도의 출입을 금한다고 발표하고, 6월 28일에는 일본 해상경비대가 독도에 일본영토 표지판을 세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MBC> 한국전쟁의 흑막과 일본 참전의 비밀





미군이 북한군에 밀려 남하할 때 즈음 38도선 부근에서 원인모를 병으로 미군들까지 죽어나갔다. 일본 731부대가 만주의 풍토병을 연구해 개발한 화학무기 '유행성출혈열'이었다. 북한군이 38도선 아래로 남하하지 못하도록 미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이런 식이다. 미군은 전세가 밀리면 항상 화학무기를 쓴다. 베트남 전에도, 이란-이라크 전에도, 시리아 내전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독일의 나치와 일본표 나치 그리고 미국표 나치가 하는 짓이 똑같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을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라도 이용해 먹고 버릴 수 있는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람에 대한 몰상식과 인명경시 사고방식 그리고 전쟁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사투를 벌이는 군인들처럼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도 생각할 줄 모르고 오로지 목적달성만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다 한다는것이다. 지금 현재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전 국민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벌어지고 있는 국정원, 새누리당, 검찰, 언론 등의 지롤발광을 통해서 이들이 현재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출처 http://dancingwithwaves.tistory.com/584

2. 요시다 시게루(Yoshida Shigeru)와 한반도 재진입

 

 

 

1948년 사회당의 카타야마 내각이 와해되고, 카타야마와의 연립정부를 깬 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芦田 均, 1948년 3월~1948년 10월)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자중지란은 계속되었고,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자유당(Liberal Party)의 요시다 시게루(Yoshida Shigeru)가 민주당 의원 모임인 민주클럽 소속 의원들과 함께  민주자유당(Democratic Liberal Party)를 창당하고, 요시다 내각이 출범했다(1948년 10월~ 1954년 12월까지 수상 재임).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요시다 시게루





탄광국 뇌물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다나카는 1949년 중의원 선거에 옥중출마해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고, 나가오카(Nagaoka Railway) 철도 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일본 법원은 '뇌물이 아니라 정치헌금'이라는 논리로 다나카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법무부 차관을 지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6.25전쟁)에 요시다는 미군을 위해 자위대를 파견하며 참전한다. 평화헌법을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위반한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 나치를 키워서 독일 정권까지 장악하게 지원하고, 미국에서도 히틀러 나치식의 파시스트 독재정권을 세우려 쿠테타 모의까지 했었던 미국표 나치세력과 이들이 떠들어 대는 '냉전', '반공'이라는 말장난에 경도된 '선의'를 가진 미국인들에게는 미국의 군사위성국으로 전락한 일본의 구일본군과 일본의 전범세력은 반성하고 청산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버리기 아까운 유용한 자산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한창 중이었던 1952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1954년 <자위대법>에 의해 자위대 창설된 후, 유엔회원국이 되었다(1956년). 정작 피해자였던 남한은 피해보상은 커녕 최소한의 사과도 받지 못한 것도 모자라, 주권을 잃어버린 죄로 1991년이 되어서야 북한과 동시가입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유엔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1991년 9월 17일)





(1) 1950년 한국전쟁과 일본 참전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협정

 

 

 

일본에 요시다 시게루 정부가 두번째로 출범한 후 한반도에서 1950년 한국전쟁(6.25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도쿄에 있는 미극동군사령부가 지휘하고,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의 승인을 얻어 구일본군인들은 - 2차 대전 당시의 연합국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GHQ)  후신인 -  '미극동군사령부' 조직하의 정보부 '전사편찬실'에 근무하고, 혹은 한반도 전투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이 같이 손잡고 1947년 제정된 일본의 평화헌법을 송두리채 폐기처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므로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남북전쟁에 구일본군을 참전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냥 전쟁만 이기면 그만일 뿐. 혹은 한국전쟁은 미국표 나치가 전후 새로이 깔기 원했던 '냉전시대'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므로 "북한과 남한이 '좌.우' 이념으로 나뉘어 전쟁을 했다" 이 자체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 외 나머지는 무시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반도에서의 한국전쟁은 미국이 야기한 것이라는 주장이 꽤 설득력있게 들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현재까지 모은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의 한국전쟁은 미국표 나치의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통해 소위 '냉전'시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자유주의','민주주의' vs '공산주의', '전체주의' 라는 해괴한 논리가 자리잡게 된다.  이 반공 논리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뭐든지 다 '선'이다라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표 나치의 작품인 이 반공논리에 따르면 '공산주의'에 반대하기만 하면 아무리 악질 독재자라도, 의회를 없애고, 법관들은 대통령이 다 임명하고, 체육관에서 선거를 해도, 헌법 위에 군림하는 정보부가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잡아가서 빨갱이라고 고문하고 괴롭히고 죽이고해도 여전히 '악'인 북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선'이라는 논리를 강요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해주었다. 이런 냉전식 반공 사고의 전형이 '경제지상주의'이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이명박표 남한을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라는 왕관을 씌워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제팀에 의해서 강제로 이식되었던 남한의 삼성왕국의 만행은 이렇게 해서 그 합리화 논리를 마련하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일 매국노들이 '반공'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해방된 남한에서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지식인들을 비롯한 선량한 시민들을 '빨갱이'라고 잡아가서 고문하고, 죽이고, 탄압하는 요지경 세상을 만드는 데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왜곡된 '반공' 이념이 초래한 사회병폐는 비단 남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친일 매국이나 하며 자신의 돈벌이와 출세에만 혈안이 됐던 이들이 해방된 조국의 동족이 '사람'으로 보일리 없었을 것이다. 돈에 눈 돌아간 종놈 돌쇠에게 완장 하나 채워줬더니 온 동네 다 들쑤시고 다니며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꼴이라고나 할까.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기 원했던 일본 수구세력이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실지로 이런 비밀협정을 맺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MBC> 한국전쟁의 흑막과 일본 참전의 비밀 





하지만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맺어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전범국 일본이 주빈으로 초대되었음에도 남한은 옵서버 자격에 불과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어느 나라 보다도 치열한 대일 항전을 이어나갔고, 임시정부까지 갖추고 조직적인 저항을 계속했음에도 남한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 당사자가 되지 못했고, 온전한 주권 국가로 인정 받지 못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이 이렇게 완전히 뒤집어진 것은 1951년 4월 23일 미국의 대일강화 전권대사였던 델레스(John Foster Dulles)와 요시다가 만난 후였다. 미국의 존 델레스 특사와 "경찰준비군" 창설을 밀약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한국의 조인국 참여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사히 신문이 2000년 8월 22일자 기사로 공개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주빈으로 초대받지 못하고,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고 발언권 조차 없었던 남한 대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강요된 화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그리고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일본은 노골적으로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1953년 일본은 일본정부 허락없이는 독도의 출입을 금한다고 발표하고, 6월 28일에는 일본 해상경비대가 독도에 일본영토 표지판을 세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MBC> 한국전쟁의 흑막과 일본 참전의 비밀





미군이 북한군에 밀려 남하할 때 즈음 38도선 부근에서 원인모를 병으로 미군들까지 죽어나갔다. 일본 731부대가 만주의 풍토병을 연구해 개발한 화학무기 '유행성출혈열'이었다. 북한군이 38도선 아래로 남하하지 못하도록 미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이런 식이다. 미군은 전세가 밀리면 항상 화학무기를 쓴다. 베트남 전에도, 이란-이라크 전에도, 시리아 내전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독일의 나치와 일본표 나치 그리고 미국표 나치가 하는 짓이 똑같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을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라도 이용해 먹고 버릴 수 있는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람에 대한 몰상식과 인명경시 사고방식 그리고 전쟁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사투를 벌이는 군인들처럼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도 생각할 줄 모르고 오로지 목적달성만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다 한다는것이다. 지금 현재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전 국민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벌어지고 있는 국정원, 새누리당, 검찰, 언론 등의 지롤발광을 통해서 이들이 현재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출처 http://dancingwithwaves.tistory.com/584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필자가 보기에 이승만의 지난 행적은 가히 야망있는 정치인으로 보인다. 조선의 왕족으로(촌수가 매우 멀긴 하지만) 태어난 자가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감옥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나라는 망국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기회가 되어 세계 최강대국에서 조선을 대변하는 실력가가 되었다. 이런 사례를 되짚어봤을 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더 욕심을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역시 그의 이후 행적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과거시험조차 번번이 낙방하던 한낱 서생이 어떻게 망국의 사태에서 유명인사로 급부상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혼란의 시기에서 어떻게 대통령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일까. 1편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승만은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신식학교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약간의 언론인(?)적 행보를 보임과 동시에 미국으로 유학하기 위한 발판을 열심히 마련한다. 이곳에서 그는 특별히 영어공부를 열심히 함과 동시에 선교사들의 많은 추천서를 모았다. 또한 미국으로 유학하기 위해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했을 것이고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은 학생으로 비춰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조선의 개혁을 위한 목소리도 많이 내었고 또한 선교사들의 이목도 끌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것들이 효과를 발휘해서 미국의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한 많은 추천서를 받았고, 민영환등의 정치관련 인사들의 도움에 힘입어 미국에 진출하는 것에 성공하게 된다.

1904년 : 이승만은 당시 민영환의 추천으로 인해 미국으로 향하게 되고,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테프트(후에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된다, 가쓰라-테프트 협약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의 도움으로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만나게 되지만 조선 독립에 대한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미국행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 (취임당시 41세)

1905년 : 8월에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조선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승만 [李承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10년 : 재미동포 협회였던 '국민회'에 참여하게 된다. 사실 이 부분부터 논란의 소지가 많다. 바로 독립자금 줄이던 국민회의 자금을 이승만이 관리하게 되면서 많은 착복이 있었다는 것이다. (후에 언급하도록 한다) 이해 8월에 귀국하게 되고 마침 105인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도미를 하게 된다. 이 사건 역시 교회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다.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에 참석한다는 빌미로 감리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탈출한다. 여러모로 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는 이승만이다. 신민회가 해체될 때는 이미 독립 투사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안창호 선생도 이때 신민회와 함께 와해된다.

1913년 : 에 그는 그의 제 2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주하게 된다.이때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미국에만 머물게 된다.여기서 드는 또 한가지의 의문이 있다. 독립을 위한 운동의 방식도 여러가지로 다를 수 있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수장을 지내면서도 왜 조선에는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인가?

이 시기에 그는 여러권의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05인 사건(속칭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사건)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이다.

당시 이승만이 저술한 [한국교회핍박]- 105인 사건에 굳이 왜 저런 제목을 붙인 것인가?

아마도 [한국교회핍박] 이라는 제목은 미국사회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당시 거주하던 하와이에서도 '감리교회'의 명목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이렇듯 그는 주어진 상황을 매우 잘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아직도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쳐 기독교=미국=이승만 의 논리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사모나 우파진영의 유투버들만 보더라도 기독교인이 매우 많으며 상당부분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다.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라는 인사가 국민회의 또 다른 부설기관으로 "국민 군대"라는 것을 창설하였는데, 상해 임시정부나 만주지방에서 활동하였던 독립무장단체처럼 힘을 길러 무장투쟁을 하려는 조직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강하게 반대하였고 추후 일본선박 미수사건에 국민 군대가 연루되면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사이, 이승만은 국민회를 최종적으로 장악하게 된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많은 갑론을박을 낳고 있는 부분인데 일반적으로 보기에 이승만을 반박하는 좌익세력의 입장에서는 강하게 비난하는 부분이다. 비난 의견에 대하여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백년전쟁"을 참조하도록 하자.

- 백년 전쟁 편은 아마도 이승만을 옹호하는 우익세력에 의해 2편 방영이 차단된 것 같다. -

1918년 :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또 다른 세계대전 발발을 두려워했던 각국과 미국은 윌슨 대통령에 의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게 되는데, 소위 말해 각 민족의 일은 각 민족이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일본의 식민치하에 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독립의지가 불타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무력으로 인한 독립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처럼 평화적인 시위가 그나마 현실적이었다.

1919년 : 고종 사망, 이에 관련하여 일어난 3.1 운동, 이때 승만은 조선을 국제연맹에서 위임통치 하도록 하는 방안을 미국에 주청한다. 일본에서는 벗어나돼, 한국은 아직까지 독립의 힘이 없으므로 국제연맹에서 한동안 조선의 국정을 책임지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 하여금 "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도 팔아먹으려고 한다"는 비판을 듣게 한다.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광복 후에도 계속된다. 최초로 남북분단을 주장했던 '정읍발언'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청원서는 임시정부에서 크게 비난 받으며 탄핵의 결정적인 사유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청원은 미국입장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1차대전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일본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러시아를 견제할 수단으로 일본이 필요했고, 한국 식민지화를 눈감아주는 등의 이유으로 필리핀을 미국의 식민지로 삼았으며 역시나 아시아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실은 그 어떤 국가도 일본의 한국 지배를 관심있어 하지 않을 때였다. 1차 대전 직후까지는, 그래도 세계에서 제국주의의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때였다.

1919년도는 이승만에게나 대한제국에 있어서도 여러 사건들이 있었던 해였다. 그 해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여러직위를 거쳐 결국 "집정관총재"라는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 권한으로 각국에 임시정부 수장으로서 연락을 취했으며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도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에 독립자금에 대한 불투명성과, 그 돈으로 사욕을 채웠다. 또한 독립회의 자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기 위해 하와이의 지역 교민들을 협박하여 돈을 갈취했다, 또 여자친구와 고급호텔에서 지내기도 했다는 등의 여러 좋지 않은 이야기들도 존재한다. 이 내용들이 실제라면 그는 나라 잃은 백성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은 피와 땀을 개인 사욕으로 강탈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나라를 독립할 자금으로 대형 사기를 쳤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제국 주의 일본이나 친일 매국노들 보다 더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 때 당시는 이미 많은 독립 투사들이 결성되고, 또한 죽어갈 때 였으니 말이다.

고종의 장례식이 촉매제가 되어 발발했던 3.1 운동. 이후 많은 독립투사들이 무장항쟁을 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임시정부 정책에 없는 대통령직은 사칭하여 외무 업무를 이행하였다. 하여 당시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당시의 임정요원들은 "그래. 뭐든 나라에만 좋다면 뭐든 해라"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결국 공식적으로 그해 9월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공식 인정하게 된다.

후에 그는 많은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모든 활동은 미국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나 가장 강대국이며 영향력이 컸던 미국이지만 이승만이 그렇게 미국에 집중했다는 것은 조국의 광복도 미국 손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바랬거나, 예견했던 것일 수 있겠다

[출처] 이승만 (2부)|작성자 엠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