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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주룡

하늘벗삼아 2014. 4. 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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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노동자 강주룡 을밀대 오르다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앞마당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렸다. 그 시대 그 새벽에 을밀대까지 산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살 만한 사람들이었다.

을밀대 지붕 한 귀퉁이에서 몸을 움츠린 채 잠들어 있던 한 여성 노동자가 깨어났다. 사람들에게 외쳤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 우리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공농성 1인 시위였다.

http://cham-sori.net/bbs/view.php?id=cast&no=9737

 

1930년대 평양의 신발공장 주변엔 '고무공장 큰 아기'라는 어두운 신민요가 불려졌는데 이는 당대의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노래이다. 이 7,5조의 골목 가사엔 당시 밑바닥 여공들의 응어리 진 삶의 처절함이 베여 있다.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
감독 앞에 해죽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
감독 나리 사다준 선물이라나"

   세계공황이라는 파도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까지 밀려왔다. 소비재 산업인 고무신발공장들도 손해가 컸다. 자본가들은 공황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보통 때도 흔히 쓰던 수법을 모두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자르고, 임금을 깎고, 노동시간을 늘이고, 노동강도를 높였다.
   1930년 5월 고무공업 자본가들의 모임인 '전조선고무동업연합회'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평균 10% 깎겠다고 발표했다. 8월 1일 '평양고무동업회'에선 한술 더 떠 임금을 17% 깎겠다고 평양고무직공조합에 알렸다.
   평양고무직공조합은 '임금인하 반대, 해고반대' 등 20여개 조항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8월 7일 아침부터 5개 공장 1천 8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6개 공장에서는 태업을 벌였다. 8월 11일에는 고급기술 노동자를 포함한 기계공 3백여 명도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노동자는 2천여 명을 넘어섰다.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9월 초까지 이어졌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가운데 3분의 2가 여성노동자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 방 을 따로 만들어 여성노동자들끼리 움직이는 파업본부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8월 10일 노동자대회에서는 임금인하 반대와 해고 반대 뿐 아니라 '산전 산후 3주간 휴양과 생활보장, 수유시간 자유' 같은 모성보호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파업에 참가했다.
   강주룡도 고무신발공장 노동자로서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겪었으며, 1930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에 참여하여 경험을 쌓았다.


강주룡의 짧은 생애 치열한 삶/평원고무공장 노동자가 되어

   1931년 5월 평양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전까지 강주룡이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그해 6월 7일 <<동광>> 잡지 기자 ‘무호정인’과 했던 인터뷰 내용을 통하여 가까스로 이전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이다.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갔을 때 신문에 실린 나이는 30이었다. 우리 나이로 31살이었다고 미뤄 보면 그가 태어난 해는 1901년으로 짐작된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서간도로 이사했다. 20살 때 통화현에 사는 최전빈과 결혼했다. 남편은 나이가 5살이나 아래였다. 21살 때 16살 된 남편과 같이 백광운(白狂雲)의 독립군부대에 들어가 6, 7개월 활동하였다. ‘거치장 거려 귀찮으니 집에가 있으라’는 남편의 말에 따라 시댁으로 돌아왔다. 5, 6개월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았다. 곧바로 달려갔으나 남편은 그날 밤 숨졌다. 시집에서는 ‘남편 죽인년’이라고 의심하여 중국 경찰에 고발하였다. 강주룡은 경찰서에서 일주일 동안 단식하면서 무고함을 주장하였다.

   1924년 서간도에서 돌아와 사리원에서 일 년쯤 살았다. 1926년 평양으로 옮겨 고무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친정 부모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고, 집안을 꾸려나가는 일은 그가 해야 할 몫이었다. 노동조합에 들어가 1930년 평양 고무공장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적극 참가했다.
   강주룡의 활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31년 5월에 일어난 평양 평원고무공장노동자 파업투쟁 때부터였다.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은 회사들의 연합체인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제일 먼저 임금을 깎겠다고 나섰다. 5월 16일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겠다고 알렸다. 여성노동자들은 임금인하를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고무공업동업회에 속한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300여 명 노동자들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였다.

   5월 28일, 싸움을 시작한지 12일이 지났다.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평원 노동자들은 싸움의 강도를 높이려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는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측은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하고, 한 밤중에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강제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을밀대에서 벌인 고공농성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광목을 한 필 사가지고 한밤중에 을밀대를 찾아 올라갔다. 처음에는 죽음으로서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놓고 30여 년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죽기로 작정했는지라 더 이상 살겠다는 미련은 없었으나, ‘이대로 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리고 죽어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캄캄한 어둠 저편으로 을밀대가 눈에 들어왔다. ‘옳다, 죽더라도 저 위에 올라가 우리가 싸우는 뜻과 평원공장의 횡포를 마음껏 외치고 죽자’고 마음을 바꿨다.
   사다리도 없는데, 지붕 위로 어떻게 올라갈까 이리저리 궁리를 하였다.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한 귀퉁이 너머로 던져 넘겼다. 광목 한쪽을 기둥에 묶고 힘주어 당겨보았다. 뒤편으로 늘어진 광목에 매달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5월 말, 봄이라지만 아직도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새벽바람이 싸늘했다. 누가 광목을 타고 쫓아 올라올지도 몰랐다. 늘어진 광목을 걷어 올려 몸을 감쌌다. 계속 싸움을 하느라 피곤하고 지친 몸에 졸음이 몰려왔다. 죽을 작정을 하고 을밀대에 올라왔는데도 쏟아지는 잠을 어쩔 수 없어 깜박 잠이 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었다. 새벽 5시 조금 넘은 시간, 먼동이 트고 있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을밀대 앞마당에 몰려와 지붕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웬 여자가 무슨 사연으로 저 위에 올라가 앉아 있을까 궁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강주룡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각오를 밝히고 외쳤다. 연설을 듣던 한 예수교 장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강주룡이 을밀대 위에서 외쳤던 내용이 신문에도 간단히 실렸다. 뒤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중략)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지붕)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뿐입니다.”(??동광?? 1931년 7월호, ‘중략’부분은 원자료에도 중략한 것)

   임금인하를 막아내다

   강주룡은 을밀대 꼭대기에서 온 몸으로 자본의 착취와 식민지 권력의 폭력을 폭로하였다.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 파업투쟁이 평양 2천 3백명 고무노동자들의 생존권을 가장 앞장서서 지키는 싸움이라는 것, 근로대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명예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밝혔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달려왔다. 뒤쪽에서 소방대원이 사다리를 놓고 몰래 올라가 완강히 버티는 강주룡을 아래로 밀어 떨어트렸다. 그물 위로 떨어지면서 기절하였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풀려날 때까지, 쟁의가 해결되기 전에는 굶어 죽더라도 먹지 않겠다며 밥 한술 뜨지 않고 완강히 버텼다. 검속시간이 끝나 풀려난 강주룡은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 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을 때 다른 공장 노동자들은 동정 태업을 벌였고, 평양노동연맹을 비롯한 노동, 사회단체에서는 적극 지원하겠다고 결의하고 응원하였다.
   회사측에서는 직공을 새로 모집하여 공장을 돌리려고 하였다. 강주룡이 풀려나자 힘을 얻은 노동자들은 공장 담을 넘어 공장점거투쟁을 벌였다. 이때 안병식(23), 오양도(27), 고도실(18), 최용덕(28)이 다시 잡혀 들어갔다. 이들도 58시간 단식 투쟁으로 버티다 6월 3일 저녁에 풀려났다.
   새로 들어온 직공들을 막으려고 싸우던 강주룡과 간부들이 기절하여 쓰러졌다. 며칠 동안 단식을 해서 몸이 쇠약해진데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전차와 자동차를 가로막고 오랜 시간 진흙탕 속에서 뒹굴었기 때문이다.

6월 6일, 파업단 대표로 공장 측과 만난 강주룡은 “임금 감하를 반대하고 맹파하였던 우리 직공들도 환원해야 한다. 고주 측에서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파업 직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명예와 일가족의 생사 문제는 전연 판이한 문제가 아닌가”하고 따졌다. 회사측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가족의 생사가 달려있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6월 8일, 1개월에 걸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회사측이 임금을 깎겠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파업한 노동자 전원을 채용 하라는 요구는 이뤄내지 못하였다. 대신 파업공 27명과 신모집공 20명을 나누어 채용한다는 조건으로 쟁의가 매듭지어졌다.

6월 9일, 강주룡은 일제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 이라고 불렀던 평양지역 혁명적노동조합에 참여했던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 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시달리던 강주룡은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아픈 몸이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도졌다. 어려운 형편이라 병원조차 제대로 가보지 못하였다. 동료들의 처지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달 동안 앓아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 13일 오후 3시 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목숨을 잃었다. 서른두 살 한창 나이로, 한 많은 세상,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하였다. 이틀 뒤 8월 15일 남녀 동지 1백여 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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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이 서간도로 이사를 한 뒤, 15살짜리 남편과 결혼을 한 건 그가 20살 때 일이었다. 남편을 따라 항일무장단체에서 활동을 하던 중, 남편이 '귀찮으니 집에 가 있어라'고 해서 6개월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무엇에건 기록이 참으로 부족한 우리 역사이고 보면 이런 남편의 반응이 어떻게 전해져 올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아마도 강직한 성격의 강주룡을 생각해 볼 때 사사건건 옳은 지적만 해대는 아내가 성가스러워 쫒아버린 건 아닐까 하는 필자의 위험한 상상을 덧붙여 본다.

   남편은 그가 22살 되었을 때 전사하고 만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건 시가에서는 그를 '남편 죽인 년'이라며 중국경찰에 고발하였고, 모진 수모을 다 당한 강주룡은 그렇게 시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여자를 남자들 발끝의 때만큼도 쳐주지 않던 시절에, 더구나 하찮은 며느리로 살면서 그저 죽은 목숨인 셈치고 시부모와 남편 봉양하면서 숨죽이며 사는 게 행복한 여자의 일생이라고 뉘라서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역시 좀 고집스런 상상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24살의 나이로 친정에 돌아온 그는 부모와 어린 동생을 위해 돈벌이에 나선다. 한국 최초의 여성노동운동가의 일생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평양고무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1920년대 후반은 일제가 경제공황과 침략전쟁의 경제적 부담을 조선민중에게 전가시키며 노동자들을 가혹하고 야만적으로 착취하던 시기였다. 그 비인간적인 착취의 일차적 대상은 값싼 노동력의 조선여성노동자들이었다.

   1930년 8월6일부터 20여 일간 평양 10여개 공장 2천3백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파업동안의 기록에 남겨진 것은 없지만 강주룡은 이때 제일선에서 활약했었음이 이후 재판기록 속에서 진술되어지고 있다. 8월 총파업의 여진은 1931년 5월 16일 평양 평원공무공장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회사 쪽의 일방적인 임금인하 통고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 공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으며, 5월28일엔 단식투쟁을 결의하지만 일본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공장 밖으로 쫓겨나고 만다.
   밤 11시,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땅을 치며 울분을 토하던 강주룡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밤새 광목을 찢어 만든 줄을 타고 대동강변에 있는 12m 높이의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아침을 기다렸다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00명 우리 동무들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9시간 반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그의 외침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로 화답하고 손을 흔들어 격려하였다. 일본 경찰에 잡혀간 강주룡은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2시 풀려날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말 한 마디 하지 않으면서 단식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풀려나서도 집으로 가지 않고 동료 노동자들 등에 업혀 파업단 본부로 가 계속 파업을 지도하였다.
   부러질망정 절대로 굽히지는 않겠다는 불굴의 정신이 그의 몸과 마음을 굳게 버티어 주는 힘이었다. 누가 여자는 안 된다고 하는가? 누가 여자는 할 수 없다고 하는가? 우리 여성이 21세기의 희망인 것을 의심하지 말자. 그건 우리 안에 강주룡과 같은 힘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6월 9일 대대적인 노동운동의 탄압으로 '평양적색노조사건'이 불거지고 강주룡은 여기에 연루되어 또 다시 일제 경찰에 잡혀 들어간다. 그리고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병보석 출감한 그는 동료 노동자들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양 근교 빈민굴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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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혁명적노동조합운동과 ‘평양적색노조’

1930년대 들어서면서 드러내놓고 노동운동을 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세계대공황과 전시경제체제 아래서 식민지 지배 권력의 탄압이 거세졌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났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배경으로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가 이름을 붙인 ‘적색노조’나 ‘좌익 노동조합’같은 조직들이 혁명적 노동조합이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기업별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바꾸고, 노동운동을 디딤돌 삼아 밑으로부터 당을 다시 만들고, 생존권 투쟁은 물론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운동이었다. 총독부가 만든 부정확한 통계를 보더라도 1931~35년 사이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검거된 건수가 70여 건이었으며, 1,759명이 감옥으로 잡혀갔다.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합법의 틀 안에서 활동하던 노동조합을 개량주의 조합이라고 비판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비밀결사체였지만 겉으로는 합법 형태를 내세운 노동조합, 파업본부, 노동자 친목회 같은 여러 가지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조직을 만드는 과정은 사업장을 중심으로 ‘반’이나 ‘공장그룹’ 같은 세포조직을 기초로 분회를 두고, 분회 위에 공장위원회, 그 위에 지역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든 뒤 전국을 아우르는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이끌어 갔던 사람들은 그때까지 전향하지 않고 활동하던 1920년대 사회주의자, 코민테른과 이어져 국외에서 들어온 활동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활동하던 사회운동가, 노동조합운동의 간부, 광주학생운동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든 학생운동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노동운동을 하면서 커온 선진노동자들이었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대표되는 사례들은 1933-36년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이재유그룹, 4차에 걸쳐 계속된 '태평양노동조합사건(1930-35)', 원산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들 수 있다.

강주룡이 참여하였던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조’도 1930년대 만들어진 혁명적 노동조합의 하나였다. 평양지역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의 중심인물은 정달헌이다. 강주룡이 밑으로부터 커온 선진노동자였다면 정달헌은 엘리트 출신의 사회주의 활동가였다. 정달헌은 1899년 함남 흥원군 주익면 신계리에서 태어났다. 함흥 영생중학과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24년 8월 신흥청년동맹 기관지 ??신흥청년?? 동인이 되었으며, 1925년 9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발기 대회에 참가하고 창립이후 간부를 지냈다. 1926년 2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그 무렵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제2구 제2야체이까 학생부 책임이 되었다. 1926년 5월 중순 무렵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려고 러시아로 갔다. 1926년 9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29년 5월 졸업했다. 1930년 8월에 모스크바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흥원 방면에서 활동가들을 모아 세우는 일을 시작하였다.

강주룡이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라며 했던 활동은 당시 사회변혁을 꿈꾸던 활동가들,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만족한 생활, 자랑스럽고 뜻있는 생활’이었을 것이다.

강주룡의 길지 않은 생애와 실천을 통하여 오늘 다시 새겨보아야 할 것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으며 원칙대로 꼿꼿하게 사는 삶, 자신만이 아니라 대중의 이해를 실현하려고 앞장서는 실천,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버릴 수 없는 희망, 역사의 흐름을 따라 제 길을 걸어가는 자랑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 강주룡은 1901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되며 14살때 아버지의 실패로 서간도로 옮겨갔다. 20살에 최전빈과 결혼했으며 이듬해에 남편과 함께 독립군부대에 편입하여 활동하다가 남편이 죽자 귀국하였다. 1926년 평양 고무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에 앞장섰다.

* 세계대공황은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 독점자본은 공황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깍고, 노동시간을 늘이고 노동강도를 높였다. 1930년 고무공업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평균 10%정도로 깎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평양고무직공조합은 ‘임금 인하 반대, 해고 반대’ 등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 강주룡도 1930년에 있었던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투쟁에 참가하였다. 강주룡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31년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때부터이다. 파업투쟁에 앞장섰던 강주룡이 평양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다. 이후 강주룡은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임금인하를 막아냈다.

* 1930년에 들어서면서 합법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식민지 지배 권력의 탄압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강주룡도 1930년대 만들어진 혁명적 노동합의 하나인 ‘평양 적색노동조합’ 활동에 참가했다. 이 활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에 감지되었고 강주룡도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증세에 시달리다 1932년 병보석으로 풀러났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풀려난 지 두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 강주룡은 봉건사회의 틀을 벗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한 노동자로서 우뚝 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여성노동자였다. 강주룡은 노동자 출신으로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선진노동자로 파업투쟁의 지도자로, 그리고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로 성정한 노동운동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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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密臺上의 滯空女 -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제23호

無號亭人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여가 돌현하였다. 평원고무직공의 동맹파업이 이래서 더 유명하여졌거니와 작년중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연돌남과 비하여 좋은 대조의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중략)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중략)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지붕)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이것은 강주룡이 5월 28일 밤 12시 을밀대 지붕위에서 밤을 밝히고 이튿날 새벽 산보왔다가 이 희한한 광경을 보고 모여든 백여 명 산보객 앞에서 한 일장 연설이다. 이 연설을 보아서 체공녀 강주령의 계급의식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생애를 살았으며 어떤 환경의 지배를 받았나? 이것이 편집자로부터 내게 발한 명령이다.

6월 7일, 부외 선교리 평원고무직공 파업단 본부로 강주룡 여사를 방문하였다. 유달리 안광을 발하는 작은 눈, 매섭게 생긴 코, 그리고 상상 이상의 달변은 첫 인상으로 수월치 않은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의 과거 생애가 듣는 나를 놀라게 하였다. 오늘 그의 가진 의식과 남자이상의 활발한 성격이 우연한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 잠간 나는 붓을 돌리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의 그의 과거 생애의 독백을 속기한다.

나의 고향은 평북 강계입니다. 열네살까지는 집안이 걱정없이 지냈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여 내 나이 열네살 적에 서간도로 갔습니다. 거기서 농사하면서 7년동안 살았는데 스므살 나던 해 통화현에 있는 崔全斌이라는 이에게 시집갔습니다. 남편은 그때 겨우 15세의 귀여운 도련님이었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도 남편을 사랑하였습니다. 첫눈에 아주 귀여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었습니다. 부부의 의도 퍽 좋았습니다. 동리가 다 부러워하였답니다.

시집간지 1년후부터 우리 부부의 생애에는 큰 변동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00단 수령 白狂雲(지금은 그이도 죽었습니다)씨의 제2중대에 편입된 것입니다. 물론 나도 남편과 같이 풍찬노숙하며 00단을 따라다녔습니다.
6, 7개월 00단을 따라다녔는데 나중에는 [거치장 거려서 귀찮으니 집에가 있으라]는 남편의 명령을 받고 나는 본가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남편이 백광운씨의 제2중대에 편입된지 1년만이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본가에 돌아온지 5,6개월 후였는데 우리 본가에서 백여리나 되는 촌락에서 남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벌써 틀렸습니다.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먹였더니 좀 정신을 차렸었으나 그날밤으로 죽었습니다. 밤에는 단지 나혼자 그를 간호하고 있었는데 잠간새에 숨이 끊어졌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서 바늘로 살을 찔러보고야 아주 죽은줄 알았으나 이미 죽은 사람이라 시신옆에서 한잠자고 이튿날 아침 병문안 왔던 사람들 손으로 묻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시집으로 도라갔었습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시집에서는 나를 의심하여 남편 죽인년이라고 중국경찰에 고발하여 일주일이나 갇혀서 고생했습니다. 하도 원통하고 또 돌봐주는 이도 없어서 일주일을 꼬박 굶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흘쯤 단식이야 쉽지않아요?)

서간도서 귀국한 것은 내가 스물네살되든 해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리원서 일년쯤 지냈는데 부모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내가 밥벌이를 하면서 아들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평양온 것이 벌써 5년째 됩니다. 처음부터 고무공장 직공으로 밥벌이를 했지요. 고무직공조합에는 작년파업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입회했습니다.

을밀대에 올라갔던 얘기요? 그야 다 아시지 않아요? 5월 29일 밤 우리는 전술을 고치어 단식동맹을 조직하고서 공장을 사수하기로 하고 공장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밤 한 시나 되니까 공장주는 경관에 의뢰하여 우리를 공장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동무들이 대성통곡하면서 쫓겨나올 때 나는 차라리 이 목숨을 끊어서 세상사람들에게 평원공장의 횡포를 호소할 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장에서 쫓겨나오는 대로 거리에서 일본 광목 한 필을 사가지고 을밀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사꾸라] 나무가지에다 광목을 걸어놓고 생각하니 내가 이대로 죽으면 젊은 과부년이 또 무슨 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었나하는 오해를 받을 듯하여 기왕이면 을밀대 지붕위에 올라갔다가 아침에 사람이 모이면 실컷 평원공장의 횡포나 호소하고 시원히 죽자고 맘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을밀대 지붕위에 올라갈 길이 막연하였습니다. 궁리 끝에 광목 한 끝을 올개미를 지어서 지붕 마루위에 걸어보려고 애썼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마지막의 묘안에 나는 성공하였습니다. 광목 한 끝에 무거운 돌을 달아서 지붕 건너편으로 넘겨놓고 줄을 당겨보았더니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줄에 매달려 [그네]를 뛰어서 안전함을 시험한 후에 이줄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가 아마 새벽 두시는 되었을 것입니다. 사면이 고요한데 기생을 끼고 산보하는 잡놈을 두 개나 보았습니다. 아직 날이 밝기는 멀었는지라 광목을 걷어 올려 몸을 가리고 한잠 잤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내가 요란한 소리에 놀라깬 때는 벌써(중략)

그는 벌써 한 개 노동자가 아니라 49명의 노동자를 거느리고 투쟁의 선두에 나선 리더의 한 사람이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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